세상사는 이야기

실미도사건 재구성

구자융 2011. 12. 4. 09:42

반나절 만에 끝난 처음이자 마지막 작전 '청와대행'
실미도사건 재구성
실미도 사건은 분단시대의 아픈 현실이자 역사다. 실미도 본 섬인 무의도 주민들과 희생자들에게는 수년 전까지도 입을 굳게 닫은 채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비극이다. 2004년부터 실미도 사건은 세상 밖으로 들춰지기 시작했다. 영화 ‘실미도’가 촉매제였다.

실미도에 주둔했던 기간병들과 무의주민, 탈취 당한 버스에서 살아나온 이들은 ‘영화가 사실과 거리가 멀다’ ‘60%정도만 실제와 같다’고 말했다. 또 ‘훈련병들이 지나치게 미화됐다’고 덧붙였다.

그들의 증언과 과거사진상위원회 발표와 기록을 종합해 실미도 사건을 재구성 한다.

1971년 8월22일 늦은 밤 실미도 부대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부대가 창설된 후 술구경은 처음이었다. 신참이 복귀하면서 ‘와룡소주’를 사왔고 교육대장은 고심하다가 음주를 허락했다. 오랜만에 들이킨 술에 기간병들과 훈련병들은 취해갔다. 기간병들은 술판이 참극의 도화선이 될 줄은 눈치채지 못했다. 실미도에서 복무했던 기간병 양동수 상병(위장계급 하사)은 그 때를 ‘훈련병들의 분위기가 처음과 많이 달라진 것은 어느정도 감지하고 있었다’며 사전에 훈련병들이 모의를 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하지만 참극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술판이 벌어지자 훈련병들이 그날 밤을 기회로 보고 기간병들을 취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술판은 다음날 새벽 1시까지 이어졌다.

다음날 8월23일 새벽 5시. 장모 훈련병은 일명 ‘빠루’라는 쇠뭉치 장도리로 잠들어있는 교육대장 김준웅 준위(위장계급 대위)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교육대장은 뇌가 터진 채 즉사했다. 이어 훈련병들은 무기고에서 카빈소총과 실탄을 챙겨 기관병 막사로 내달렸다.

들이닥친 훈련병들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은 오전 6시쯤. 총성에 잠이 깬 기관병들은 속옷 바람에 옷을 걸치거나 소총을 챙기다 쓰러졌다. 이중 몇몇은 바다와 산을 향해 뛰었다.

구사일생 기간병 5명이 목숨을 건졌다. 양동수상병도 관통상을 입은 채 바다로 달려 목숨을 건졌다.

사고 한 달 전까지 684부대 소대장으로 복무했던 김이태(당시 23세)씨는 24일 본대 부대원과 월미 2함대 사령부 부두에서 관을 싣고 실미도로 들어가 사체를 수습했다. 야산동굴에서 왼쪽 가슴에 총 3발을 맞은 채 숨져있는 기간병 박종화를 발견했다.

“동굴 안에 눈을 뜬 채 누워 있었습니다. 월남에서 샀다던 4천700원짜리 미제손목시계에서 째깍째깍 소리만 들리는데 그 심정을 말로는 다 못합니다.”

김씨는 “사건 전날 외박으로 변을 모면한 김방일 소대장이 눈을 쓸어내리자 망자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고 회상했다. 기간병 박만종의 사체는 보이지 않았다. ‘못 찾겠구나’ 싶어 막막한 심정에 담배를 꺼내 무는데 부대에서 키우던 개가 눈에 들어왔다.

“개도 너무 놀란 터라 눈알이 빨갑디다. 그런데 얘가 끙끙거리면서 내무반 마루 아래로 비집고 들어가요. 그래 속을 들여다보니 런닝과 팬티 바람에 소총을 맨 박종화가 쪼그려 안은 채 죽어있어요. 어떻게 된 건지…. 거기는 개도 들어가기 힘들 만큼 낮은 곳이에요. 가슴이 먹먹합디다.” 김씨는 부하들의 사체를 찾으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683부대는 1968년 북한의 남파공작부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보복을 위해 그해 4월 창설됐다. 훈련병은 거의 물색관들에 의해 모집됐다. 물색관들은 ‘평양에 갔다오면 3천만원을 주겠다’ ‘장교로 임관시켜 주겠다’는 말로 꼬드겼다.

훈련병들이 사형수나 무기수로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당시 정부가 발표한 군특수범 신분도 거짓말로 드러났다. 군 과거사위는 ‘전원 민간인’이라고 공개했다.

김씨도 “서류상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들끼리 ‘소매치기, 택시운전, 암표장사를 했다’는 얘기를 주고받은
   
것을 들었다”며 “가벼운 죄로 전과 경력이 있는 자들이거나 민간인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훈련병은 김신조 일당과 같은 31명이었다. 평균 연령은 30세. 최연장자는 38세, 최연소자는 21세였다. 훈련병 월급은 당시 육군병장의 400원 10배에 해당하는 4천100원. 사관후보생과 맞먹는 액수였다. 이틀에 한번 꼴로 돼지고기가 반찬으로 나왔고, 담배는 최고급 ‘신탄진’이 지급됐다.

장교는 부대장 김응수 소령(가명·김호), 교육대장 김준웅 대위(실제계급 공군상사), 소대장은 하사 김이태(가명 김빈)와 김방일 외 1명이다. 기간 사병은 42명이다. 훈련병들은 남파 공작원들이 받았던 훈련을 답습하며, 최정예 교관 지휘로 교본을 토대로 연마했다. 담력을 키우기 위해 연고가 없는 묘지에서 해골을 가져와 야외에 꽃아 놓았다.

작전명은 ‘오소리.’ 알려진 목표는 평양 주석궁 폭파와 김일성 암살이었다. 하지만 실제는 장진강·부전강 댐을 폭파는 것이 임무였다. 훈련 또한 이에 초점을 맞췄다. 3개월 내 교육을 마치고 그해 9월까지 북파공작을 수행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훈련 석달이 지나고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중앙정보부장이 이후락으로 교체되면서 작전개시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월급과 식사 등 모든 처우가 곤두박질했다. 1970년에는 예산지원이 아예 끊기자 보리밥과 단무지가 나왔다. 월급도 중단됐다. 난방용 기름이 없어 나무를 해다 때고 개밥도 먹을 만큼 허기져 있었다.

게다가 훈련병 7명이나 죽었다. 1명은 영훈련을 하다가 익사했고, 1명은 하극상 항명으로 몰매 맞아 죽었다. 이부웅·신현준 2명은 탈출하다 잡혀 즉결 처분됐다. 강찬주·강신옥·황철복 3명은 무의분교에서 20대와 10대 자매를 겁탈하고 인질극을 벌이다 2명은 현장에서 1명은 부대복귀 후 총살됐다.

필요에 의해 창설된 684부대가 3년4개월째 방치되면서 훈련병들 동요했고 배신감과 불안감이 자라났다. 동료의 죽음을 보면서 두려움도 커져갔다. 잊혀진 존재로 실미도에 영영 갇혀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엄습했다.

당시 훈련병들의 거취를 놓고 상부에서도 논란이 일었다. 월남 파병과 부대해체 후 본대 복귀, 등을 일선에서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84부대의 존재를 묻기위한 최후 수단으로 김이태씨가 훈련을 빙자한 집단사살을 자처했지만 역시 묵살됐다.

   

684부대는 상부부대와의 교신이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중단됐다. 사정상 야간에는 외부에서 부대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또 무기고 관리도 상대적으로 부실했다. 훈련병들은 노련하게 이를 악용했다. 그리고 8월23일 처음이자 마지막 작전 집단 탈출을 감행했다. 그들의 청와대행 작전은 반나절 만에 실패했다.

한때 훈련병들의 생존설이 나돌아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소설 ‘실미도’의 작가 백동호씨와 당시 부상 훈련병을 치료했던 군의관은 훈련병 24명중 최소 2~3명이 살아있을 것으로 주장했다. 탈출과정에서 초소나 이들을 맞닥뜨린 주민들의 진술상 숫자가 엇갈린다는 것이었다. 사체의 신분 확인 과정에도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미도에 총상을 입어 국군수도병원 입원 중이던 양동수 상병은 이를 일축했다. ‘군병원에 안치된 사체를 눈으로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일이 사체를 확인했고, 깊은 상처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면 군화에 표시한 이름으로 신원을 파악했으니 전원 사망이 틀림없다”고 밝혔다. 또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김이태씨는 “소설을 쓴 백동호가 나를 취재하면서 전원사망 사실을 알았으나, 소설은 다르게 쓰고 달리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미도 사건은 ‘8·23 군 특수범 난동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군은 임성빈·이서천·김병염·김창구 등 생존 훈련병 4인에게 특수살인죄만 적용해 사건을 은폐했다. 1·2심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이들에게 월남전에 보내주겠다는 등의 회유를 통해 상소포기 자필각서를 받있다. 하지만 1972년 3월10일 이들에게는 사형이 집행됐다.

2004부터 진상조사를 시작한 군 과거사위는 사형 전 ‘월급이 밀렸다, 부모님이 보고 싶다, 김일성을 죽이지 못한 채 숨을 거두게 억울하다’ 등의 이들이 남긴 자필을 확인했다.

2006년에는 전 인천시립박물 관장이었던 우문국 화백의 탈취버스 훈련병들과의 동승기가 공개돼 그들이 나눈 대화나 행적 등이 세세하게 밝혀지기도 했다.


"피투성이 현장에서 분노 … 현재진행형 아픔"
[인터뷰] 사건 발생 한달 전까지 부대 소대장이었던 김이태씨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같이 먹고 같이 잤는데 결국….”

사건이 터지기 한 달전까지 실미부대 소대장이었던 김이태(66)씨는 사건 다음날 피투성이 사체가 널브러진 현장에서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다.

사건 당일인 23일 김이태 중사는 오류동 2325본대에서 낙하훈련 인솔을 준비하고 있었다. 군용트럭에 기구들을 실은 뒤 김해발 비행기의 착륙 연락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이때가 오후 1시 전후. 송도의 무장공비 소식이 들려왔다.

김 중사는 ‘아차’했다. 작전과에 공비가 개구리복장(얼룩무니 군복)인지와 견장과 모자 등 차림새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또 첩보통신대에 사건 전날인 22일 이후 ‘오소리(실미 부대원)’과 교신 여부를 확인했다.

직감은 적중했다. 김재엽 부대장에게 ‘그게 맞다. 섬에 있던 오소리가 튀어 나왔다’고 두 번째 보고를 했다. 군 비행기가 인천 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확신이 들었다.

상부는 ‘김이태를 잘 지켜라. 튀어 나가면 큰일 난다’는 명령을 하달했다. 김이태 중사는 24일 실미도에 들어가기 전까지 본대 안에서 줄곧 감시를 당했다.

김 중사의 참담함은 무의분교 강간사건과는 비교가 안됐다.

중국인 윤관방 37세라고 적힌 묘지를 파헤쳤다. 시체의 뼈를 갈아 훈련병 전운에게 먹여 폐병을 고친 그였다. 애틋하게 대했던 황철옥은 강간사건으로 배신감을 안겨줬다. 황이 공범의 칼에 찔려 내장이 돌출한 상태로 숨을 헐떡이자 김 중사는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 발로 숨통을 끊었다. 가슴이 찢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자비한 총질로 목숨을 죽이고 죽음을 택했다.

“죽은 애들을 수습하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이 새끼들이 이렇게 가다니… 이럴 수가.”

김씨에게 8·23사건은 현재 진행형 아픔이다. 그때의 생존병들은 일년에 서너번씩 만난다. 6월6일은 동료들이 묻힌 국립묘지에서, 8월23일에는 위령제를 지낸다. 몇차례 실미도에도 갔었다.

김씨는 훈련병들이 김신조가 속했던 북한 124부대의 실력을 능가했다고 평했다.

사망소식을 듣고 한편으로는 ‘가르친 대로 자폭했으니 훈련은 제대로 됐구나’는 생각을 했다고 덧붙였다.

 

 

                                                                               출처: 2011/8/23  인천신문 유승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