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사건 재구성
반나절 만에 끝난 처음이자 마지막 작전 '청와대행' | ||||||||||||||||||
실미도사건 재구성 | ||||||||||||||||||
실미도 사건은 분단시대의 아픈 현실이자 역사다. 실미도 본 섬인 무의도 주민들과 희생자들에게는 수년 전까지도 입을 굳게 닫은 채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비극이다. 2004년부터 실미도 사건은 세상 밖으로 들춰지기 시작했다. 영화 ‘실미도’가 촉매제였다. 실미도에 주둔했던 기간병들과 무의주민, 탈취 당한 버스에서 살아나온 이들은 ‘영화가 사실과 거리가 멀다’ ‘60%정도만 실제와 같다’고 말했다. 또 ‘훈련병들이 지나치게 미화됐다’고 덧붙였다. 그들의 증언과 과거사진상위원회 발표와 기록을 종합해 실미도 사건을 재구성 한다. 1971년 8월22일 늦은 밤 실미도 부대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부대가 창설된 후 술구경은 처음이었다. 신참이 복귀하면서 ‘와룡소주’를 사왔고 교육대장은 고심하다가 음주를 허락했다. 오랜만에 들이킨 술에 기간병들과 훈련병들은 취해갔다. 기간병들은 술판이 참극의 도화선이 될 줄은 눈치채지 못했다. 실미도에서 복무했던 기간병 양동수 상병(위장계급 하사)은 그 때를 ‘훈련병들의 분위기가 처음과 많이 달라진 것은 어느정도 감지하고 있었다’며 사전에 훈련병들이 모의를 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하지만 참극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음날 8월23일 새벽 5시. 장모 훈련병은 일명 ‘빠루’라는 쇠뭉치 장도리로 잠들어있는 교육대장 김준웅 준위(위장계급 대위)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교육대장은 뇌가 터진 채 즉사했다. 이어 훈련병들은 무기고에서 카빈소총과 실탄을 챙겨 기관병 막사로 내달렸다. 들이닥친 훈련병들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은 오전 6시쯤. 총성에 잠이 깬 기관병들은 속옷 바람에 옷을 걸치거나 소총을 챙기다 쓰러졌다. 이중 몇몇은 바다와 산을 향해 뛰었다. 구사일생 기간병 5명이 목숨을 건졌다. 양동수상병도 관통상을 입은 채 바다로 달려 목숨을 건졌다. 사고 한 달 전까지 684부대 소대장으로 복무했던 김이태(당시 23세)씨는 24일 본대 부대원과 월미 2함대 사령부 부두에서 관을 싣고 실미도로 들어가 사체를 수습했다. 야산동굴에서 왼쪽 가슴에 총 3발을 맞은 채 숨져있는 기간병 박종화를 발견했다. “동굴 안에 눈을 뜬 채 누워 있었습니다. 월남에서 샀다던 4천700원짜리 미제손목시계에서 째깍째깍 소리만 들리는데 그 심정을 말로는 다 못합니다.” 김씨는 “사건 전날 외박으로 변을 모면한 김방일 소대장이 눈을 쓸어내리자 망자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고 회상했다. 기간병 박만종의 사체는 보이지 않았다. ‘못 찾겠구나’ 싶어 막막한 심정에 담배를 꺼내 무는데 부대에서 키우던 개가 눈에 들어왔다. “개도 너무 놀란 터라 눈알이 빨갑디다. 그런데 얘가 끙끙거리면서 내무반 마루 아래로 비집고 들어가요. 그래 속을 들여다보니 런닝과 팬티 바람에 소총을 맨 박종화가 쪼그려 안은 채 죽어있어요. 어떻게 된 건지…. 거기는 개도 들어가기 힘들 만큼 낮은 곳이에요. 가슴이 먹먹합디다.” 김씨는 부하들의 사체를 찾으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683부대는 1968년 북한의 남파공작부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보복을 위해 그해 4월 창설됐다. 훈련병은 거의 물색관들에 의해 모집됐다. 물색관들은 ‘평양에 갔다오면 3천만원을 주겠다’ ‘장교로 임관시켜 주겠다’는 말로 꼬드겼다. 훈련병들이 사형수나 무기수로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당시 정부가 발표한 군특수범 신분도 거짓말로 드러났다. 군 과거사위는 ‘전원 민간인’이라고 공개했다. 김씨도 “서류상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들끼리 ‘소매치기, 택시운전, 암표장사를 했다’는 얘기를 주고받은
훈련병은 김신조 일당과 같은 31명이었다. 평균 연령은 30세. 최연장자는 38세, 최연소자는 21세였다. 훈련병 월급은 당시 육군병장의 400원 10배에 해당하는 4천100원. 사관후보생과 맞먹는 액수였다. 이틀에 한번 꼴로 돼지고기가 반찬으로 나왔고, 담배는 최고급 ‘신탄진’이 지급됐다. 장교는 부대장 김응수 소령(가명·김호), 교육대장 김준웅 대위(실제계급 공군상사), 소대장은 하사 김이태(가명 김빈)와 김방일 외 1명이다. 기간 사병은 42명이다. 훈련병들은 남파 공작원들이 받았던 훈련을 답습하며, 최정예 교관 지휘로 교본을 토대로 연마했다. 담력을 키우기 위해 연고가 없는 묘지에서 해골을 가져와 야외에 꽃아 놓았다. 작전명은 ‘오소리.’ 알려진 목표는 평양 주석궁 폭파와 김일성 암살이었다. 하지만 실제는 장진강·부전강 댐을 폭파는 것이 임무였다. 훈련 또한 이에 초점을 맞췄다. 3개월 내 교육을 마치고 그해 9월까지 북파공작을 수행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훈련 석달이 지나고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중앙정보부장이 이후락으로 교체되면서 작전개시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월급과 식사 등 모든 처우가 곤두박질했다. 1970년에는 예산지원이 아예 끊기자 보리밥과 단무지가 나왔다. 월급도 중단됐다. 난방용 기름이 없어 나무를 해다 때고 개밥도 먹을 만큼 허기져 있었다. 게다가 훈련병 7명이나 죽었다. 1명은 영훈련을 하다가 익사했고, 1명은 하극상 항명으로 몰매 맞아 죽었다. 이부웅·신현준 2명은 탈출하다 잡혀 즉결 처분됐다. 강찬주·강신옥·황철복 3명은 무의분교에서 20대와 10대 자매를 겁탈하고 인질극을 벌이다 2명은 현장에서 1명은 부대복귀 후 총살됐다. 필요에 의해 창설된 684부대가 3년4개월째 방치되면서 훈련병들 동요했고 배신감과 불안감이 자라났다. 동료의 죽음을 보면서 두려움도 커져갔다. 잊혀진 존재로 실미도에 영영 갇혀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엄습했다. 당시 훈련병들의 거취를 놓고 상부에서도 논란이 일었다. 월남 파병과 부대해체 후 본대 복귀, 등을 일선에서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84부대의 존재를 묻기위한 최후 수단으로 김이태씨가 훈련을 빙자한 집단사살을 자처했지만 역시 묵살됐다.
684부대는 상부부대와의 교신이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중단됐다. 사정상 야간에는 외부에서 부대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또 무기고 관리도 상대적으로 부실했다. 훈련병들은 노련하게 이를 악용했다. 그리고 8월23일 처음이자 마지막 작전 집단 탈출을 감행했다. 그들의 청와대행 작전은 반나절 만에 실패했다.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같이 먹고 같이 잤는데 결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