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성具

능성 구씨, 용인의 대표 명문 자리매김

구자융 2014. 10. 26. 15:57

용인시민신문 펌)

 

11개 파로 분파한 능성 구씨, 용인의 대표 명문 자리매김

 

능성 구씨의 시작

구씨의 관향 ‘능성’은 백제시대 이등부리현, 죽수부리현으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 때 능성 군으로 바뀐 지명이다. 능성이라는 지명은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변경돼 오다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통·폐합될 때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이 된 곳이다. 관향인 능성 지명이 여러 차례 변경돼 왔어도 능성 구씨들은 일관되게 능성을 본관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암면 석천리 능성 구씨 재실 숭모재 전경


능성 구씨의 시조는 벽상삼한삼중대광 검교 상장군에 오른 구존유(생몰 미상)이다. 특히 시조 구존유의 부인은 송나라가 몽골에 패망(1224년)하자 고려로 망명한 7학사 중 한분인 주잠의 딸이다. 주잠의 증조부는 유학의 대가인 주희로 그 명망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구존유의 아들이며 2세조인 구민첨은 평장사를 역임했고, 민첨의 아들 구연은 등과해 안동면등과판관을 지냈다고 한다.

6세인 구서진은 지영주부사, 구휘는 소부윤, 구의는 공조전서를 역임해 능성 구씨는 명문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7세에 이르러서 11개 파로 분파됐으나 이중 전서공파는 후손이 끊겨 현재는 10개 파만 남아있다.

여러 파벌 중 주요파의 파조(성씨에서 여러 갈래로 나와 분리된 것)와 후손들 세거지를  살펴보면, ‘판서파’의 파조는 사제감 판사를 역임한 구현좌이며 후손들은 현재 경기도 장단과 황해도 안악 일원에 세거하고 있다고 한다. ‘시랑파’의 파조는 시랑벼슬을 한 구영량으로 후손들은 충북 보은과 옥천 일원에 세거하고 있다.

‘좌정승파’의 파조는 구홍으로 삼중대광에 오른 인물로 후손들은 충북 음성과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일원에 세거해오고 있다. ‘판안동공파’의 파조는 구성량으로 판안동대도호부사를 역임했으며 후손들은 충남 당진과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일원에 세거해 오고 있다. ‘도원수파’의 파조는 구성로이며 도원수를 역임했다. 구성로는 세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구치관의 조부이기도 하다. 후손들은 경기도 광주, 여주, 이천,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일원에 세거 해오고 있다.

현존하는 10개 파 중 도원수공파, 판안동공파, 좌정승공파가 가장 현달했다고 하며 자손도 크게 번성해 능성구문 전체 80% 정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2000년도 통계에 의하면 총 3만7709가구에 12만706명으로 조사됐다.

가문을 빛낸 선조들

   
처인구 남사면 북리에 있는 능성 구씨 묘역


능성 구씨는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해 판전의사를 역임하고 면천에 사패지를 받았다. 효자로 칭송받던 4세손 구예, 예의 아들 영검은 원나라에 난이 일어나자 원의 요청으로 원군이 돼 최영과 함께 출전해 공을 세우고 전리판서에 올랐다. 영검의 아들 구위는 숭록대부 보문각, 대제학, 판의금부사를 역임하면서 능성 구문은 고려 말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구씨 가문도 다른 집안과 마찬 가지로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인물과 개국에 협조한 인물로 나뉘게 된다.

절의파로 전서파의 파조 구현좌는 고려 말 사제감판사를 역임했으나 조선에서 벼슬하지 않고 해미에 은거했다. 좌정승공파 파조 구홍은 우왕 때 밀직부사를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면천군에 봉해졌으나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에 들어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이와 반대로 조선 개국에 공헌한 인물로 판안동공파의 파조 구성양은 조선 태조 때 해풍도 상장군을 거처 한성부윤을 역임하고 판안동대호부사가 됐다. 도원수공파 파조인 구성로는 우왕 14년 조전원수로 요동정벌에 참여해 고려 말 경상도도절제사를 거처 조선 개국 후 자헌대부로서 판안동대호부사, 강원도도원수를 역임했다.

이후 능성 구문은 질곡을 거치면서 9세이며 도원수공파 파조 구성노의 손자인 구치관부터 크게 현달하기 시작했다. 구치관은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되고 후에 영의정을 역임한 인물로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해 청백리에 녹선됐다.

이후 능성 구문에 현달한 인물을 보면 이조정랑으로 있다가 ‘기묘사화’로 삭직당한 구수복, 해주목사 대사성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호종공신에 책록된 구성, 인조조의 인물로 경사에 일가를 이룬 구성임, 임진왜란 때 호종공신 1등으로 책록되고 청렴 강직해 청백리에 녹선 된 구곤원, 영조 때 경기도 수군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무관으로 명망이 높았던 구성임이 있다.

일제에 항거한 인물로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의병을 이끌고 일군에 항거한 구춘경, 1920년 동만주 일원에서 독립군을 지휘한 구춘선,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며 재정위원으로 활동한 구영필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능성 구씨 가문은 조선시대 과거급제자 총 562명, 이중 진사가 144명, 문과 55명, 무과 363명을 배출했다. 이는 과거급제자 중 65%가 무과 출신임을 보면 가히 무과집안이라 할 수 있다.

용인의 능성 구문

   
남사면 통삼리 능성 구씨 판안동파 시제 모습


용인의 구씨들은 오래전부터 처인구 남사면, 백암면, 양지면 일대에 세거해 왔다.

양지면의 구씨는 도원수공파 지파인 ‘밀직공파’ 후손들로 150여 년 전 시조로부터 24세손인 구연호가 하남에서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구씨들이 세거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까지 만해도 농사를 지으면서 10여 호가 살고 있었으나 현재는 5호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곳 출신 중 사회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이웅희 전 국회의원의 장인 구자영이 내사면(현 양지면) 면장을 역임했고, 2000년대 용인경찰서장을 역임한 구본걸, 이웅희 국회의원의 보좌관을 지낸 구본근, 숭조사상을 고취하며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구본용·구본상이 있다.

백암면의 능성구문은 두문동 72인의 한 분이며 ‘좌정승공파’ 파조 구홍의 손자 구익수가 석천리에 이주하면서 능성 구씨들이 세거하기 시작했다. 구익수는 조선 초 사육신, 생육신과 교분이 두터웠던 인물로 세조가 공조참판에 제수했으나 거절하고 백암으로 낙향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백암의 능성 구씨는 약 600여 년 전부터 세거해온 것으로 보인다. 현재 백암면 일원에 40여 호 가량 남아 있으나 과거에는 100여 호 이상 세거하고 있었다고 한다.

백암의 구문들은 선조의 유업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상호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능성 구씨 좌정승공파 용인종친회를 조직해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석천리 덕은마을에 입향조 구익수의 묘가 있는 산에 능성 구씨 공원묘원을 조성하고 제당을 마련해 묘선재라 이름을 지었다. 매년 10월 종원 100여 명이 모여 시제를 올리고 종사에 관한 총회를 열고 있다.

백암면 일원 능성 구씨 중 사회에 기여한 인물로 용인교육장을 역임한 구자학, 언론사 기자로 있다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특보를 역임한 구범회가 있다. 종친회장을 역임하면서 후손들에게 숭조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노력하는 전 회장 구준회, 현 회장 구본진이 있다.

남사면의 능성구문은 ‘판안동공파’ 파조이며 판안동대도호부사를 역임한 구성량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시조로부터 18세손인 구명징의 후손들이다.

입향조가 18세손인 것으로 봐선 남사 일원에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300여 년 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입향 경위를 보면 충청도 당진에서 화성시 동탄면 장지리로 이거했다가 ‘장지리는 양반이 살 곳이 못된다’ 해서 인근 통삼리로 이거해 현재 남사면 일원에 능성 구문이 세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 남사면 북리, 통삼리 일원에 100여 호가 세거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200여 호가 살았다고 한다.

남사 구씨들 중 사회에 기여한 인물로 제4대 용인군 국회의원을 역임한 구철회, 전매국장을 지낸 구와회와 동양방송 앵커를 지낸 구박, 용인교육장을 역임한 구자혁, 남사면장을 역임한 구자철·구연호, 남사중학교 교장을 지낸 구본흥, 용인시 공무원으로 1970년대 유엔개발계획 UNDP와 연계해  남사 농지개량사업에 공헌하고 시의원을 역임한 구본설이 있다. 광복후 대한청년단 남사지대장을 역임하며 남사 일원의 치안유지에 공헌한 구연벽이 있다. 

구연벽은 체구가 크고 유도가 5단이라 하는데 연벽이 일제 강점기 종로경찰서 형사로 재직할 때 일화가 전한다. 연벽이 종로구역을 순찰할 때 어느 주점에서 큰소리로 떠들며 술 마시는 이에게 “조용히 하라” 하니 청년이 불만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자 구형사가 귀싸대기를 때렸다 한다.

이에 청년이 도망함에 순찰을 마치고 이튿날 출근하니 서장이 급히 부른다는 말을 듣고 서장실에 들어가니 “자네 어제 술집에서 사람 때린 일이 있는가” 물었다. 대답하기를 “술집에서 소란을 피우기에 때렸습니다” 하니 “네가 때린 사람이 김두한이니 빨리 가서 사과하지 않으면 봉변을 당할 것이다”했다 한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상관의 명령이니 할 수 없이 찾아 갔다고 한다. 구연벽을 본 김두한이 껄껄 웃으며 악수를 청하고 “치안유지를 잘 하시니 고맙소. 어제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했다고 한다. 구연벽이 생전에 함께 청년단 활동을 하던 맹두섭에게 “아마 깡패 김두환 귀싸대기 때린 사람은 나뿐이 없을 거야. 역시 김두환은 호걸일세.” 하며 이야기했다고 한다.

1930년대 용인의 성씨별 통계를 보면 구씨는 21위로 나와 있다. 2000년 성씨 통계를 보면 전국 순위가 41위로 나타나는데 70년의 시차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용인에 능성 구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실제 능성 구씨가 배출한 용인의 인물 또한 적지 않으니 능성구문이야말로 용인의 대표적 명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