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우리나라에 대한 기본 상식 알기, 무궁화 태국기,애국가.

구자융 2014. 4. 30. 22:28

<우리나라에 대한 기본 상식 알기>

많고 많은 꽃 중에서도 특별히 무궁화가 우리의 나라꽃으로 정해진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무궁화가 갖는 생명력을 이해한다면, 무궁화가 왜 우리의 나라꽃으로 선택되었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궁화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궁화는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며 같은 자리에서 피어나고 번식해 나갑니다. 이러한 완강한 자생력이, 우연히 우리 민족의 기나긴 역사 속에 괴어 있는 맥과 얼에 연결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인간들이 자신의 역정과 이상을 되새기며 그에 알맞은 꽃을 선택하여 한 나라의 표상으로 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무궁화는 그런 조건에 적합했던 것입니다. 물론 나라마다 나라꽃을 정하는 기준은 각기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그 나라의 기후나 지질, 역사, 문화 등과 관련이 깊은 식물이 나라꽃으로 정해지기 마련입니다.

영국의 나라꽃인 장미는 원래 왕실의 상징이었으나, 일반인에게 널리 사랑받게 되면서 나라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나라꽃인 엉겅퀴는 독특한 유래를 갖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에 침입하던 바이킹이 엉겅퀴의 가시에 찔려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 적의 침입을 알아챈 스코틀랜드인들이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고, 한낱 잡초에 불과했던 엉겅퀴가 결국 수많은 국민을 구한 공을 세워 나라꽃으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나라꽃 무궁화는 1000년이 훨씬 넘는 오랜 동안 우리 민족의 얼과 혼 그 자체였습니다. 무궁화에 관한 오랜 기록은 동진의 곽복이란 사람이 쓴 지리서 [산해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산해경]에는 '군자의 나라에는 무궁화가 많은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진다.'고 적혀 있습니다. 여기서 군자의 나라란 우리나라를 뜻합니다. 또 중국의 고전인 [고금기]에도 '군자의 나라의 지방은 천리인데, 무궁화가 많이 피어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기록에 의하면, 이미 1400여년 전에 우리나라 전역에 무궁화가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욱과에 속하는 무궁화는 추위에 강한 낙엽활엽수로서, 키는 3m까지 자랍니다. 어린 가지에는 잔털이 많으나 자라면서 점점 없어지고, 달걀 모양의 잎은 줄기마디에서 어긋나게 나옵니다. 잎 가장자리는 대개 3개로 얕게 갈라져서 무딘 톱니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무궁화는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약 100일동안 크고 화려한 꽃을 피웁니다. 낱개의 꽃은 이른 새벽에 피고 저녁에 지기 때문에 날마다 신선함을 느끼게 합니다. 며칠이 지나면 먼저 핀 꽃은 떨어지고 새로운 꽃이 그 뒤를 이어 피어납니다.

이처럼 꽃과 꽃이 끝없이 이어 피는 꽃이란 뜻에서 무궁화라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특히 학술적으로 무궁화를 부를 때는 학명인 '히비스커스 시리아커스'(Hibiscus syriacus)로 통합니다. 학명에 '시리아커스(syriacus)'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시리아가 원산지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또 다른 견해를 갖는 학자들은 인도나 중국이 원산지라는 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재배 역사도 상당히 오래 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원산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원산지는 아닐지라도, 과거의 기록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자라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재래종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는 1910년 이후 일본인들이 전국적으로 무궁화를 없애 버렸기 때문입니다. 한민족 말살에 급급했던 그들은 우리 민족의 얼이 담겨 있는 무궁화를 고의적으로 뽑아버린 것입니다.

그 후 1945년, 국권이 회복되면서 국기가 제정되자 국기봉을 무궁화의 꽃봉오리로 정하였으며, 다섯갈래 꽃잎인 무궁화를 정부를 상징하는 표장으로 삼았습니다.

무궁화가 우리의 사랑을 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꽃의 강건함과 순수한 아름다움 때문일 것입니다. '유여동차언여무화'라는 시가 있습니다. '여인과 함께 수레를 탔는데, 그 여인의 얼굴이 무궁화같았다'는 뜻입니다. 또 학명의 '히비스커스(hibiscus)'는 이집트의 히비스 신처럼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무궁화의 영어명은 '로즈 오브 샤론(rose of sharon)'으로 통합니다. 샤론은 가나안의 복지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을 말하는데, 무궁화는 가장 복받은 땅인 샤론에 핀 장미라고 생각된 것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찬사에 비해, 어떤 선인은 아침에 화사하게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무궁화를 보고, '이른 아침에 피어 저녁에 짐이 가련하다.'라고 했습니다. 이 글의 본뜻은 무궁화의 생태를 통해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을 비유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무궁화라는 꽃의 영락은 그 생태와 함께 인간 삶의 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생각할수록 깊은 뜻을 갖춘 강한 생명의 꽃인 것입니다.



<태극기>

국기를 게양할 때와 내릴 때에는 바른 자세로 서서 경례나 주목을 해야 합니다. 게양되어 있는 국기에 대해서는 오른편 손을(모자를 썼을 경우에는 벗어 들고) 왼편 가슴에 대어 경례합니다. 제복, 제모의 차림일 경우에는 거수경례를 합니다. 보행중 국기를 게양하거나 내리는 것을 보게 되면 곧 멈춰서서 바른 자세로 서서 경례나 주목을 해야 합니다.

국기가 자기 앞을 통과할 때에는 그 자리에 정지하고 경례나 주목을 합니다. 옥내외 집회 행사에서 국기에 대하여 경례를 할 때에는 참석자는 물론, 주변에 모인 관중도 다 같이 경례를 합니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를 할 때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마음속에 다짐하여야 합니다.

국기를 게양할 때는 위부터 매고, 풀 때에는 아래부터 풉니다. 푼 국기는 땅에 닿지 않도록 소중히 취급하여야 하며, 대체로 세로로 두번 가로로 두번 접은 다음, 국기함에 넣어 정중히 보관해야 합니다. 깃봉과 깃대는 외부가 손상되지 않도록 포장하여 국기와 같이 잘 보관합니다. 국기를 오래 사용하여 낡은 경우에는 깨끗한 곳에서 불에 태웁니다. 행사시 사용한 수기는 잘 보관하였다가 다시 사용하고 찢어진 수기도 밟거나 내버리지 말고 주워서 깨끗한 곳에서 태웁니다.

경축일에는 깃봉과 기폭 사이를 띄지 아니하고, 조의를 표할 때에는 반기를 게양합니다. 가정에서는 문 밖에서 문을 향해 왼쪽에, 식장에서는 단상을 향해 왼편에 세우거나, 중앙에 달며, 게양대가 있을 때는 고정된 위치에 게양합니다. 국기 둘을 게양할 때는 왼편, 오른편에 따로 띄어서 병립하거나 교차시킵니다. 우리나라에서 외국 국기를 함께 게양할 때는 우리 국기를 최우선의 위치에 게양합니다.


<애국가>

1절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후렴 :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절 : 남산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후렴)
3절 :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일세. (후렴)
4절 :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 (후렴)


애국가를 부를 때는 가사를 통해 조상의 빛난 얼을 되살리고, 국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몸과 마음을 다해 민족과 국가에 봉사하겠다는 결의를 다짐해야 합니다. 애국가의 곡조에 다른 가사를 붙여 부르거나, 또는 곡조를 변경하여 불러서 애국가의 존엄성을 손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보행중에 애국가(주악도 같음)가 들려오면 걸음을 멈추고, 애국가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향하여 바른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옥내외 집회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를 때에는 참석자는 물론, 일반 관중도 다같이 부릅니다.


<<고학년 이상용 자료>>

1 명칭의 유래


무궁화의 명칭은 여러 가지이며 중국에서는 목근(木槿)■순영(舜英)■순화(舜華)■훈화초(薰華草)■조개모락화(朝開暮落花) 등으로 쓰였으나 무궁화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한자로 무궁화(無窮花)로 쓰는데 이 이름은 <목근>이 <무궁>으로 변음되어 생긴 것으로 보이며 고려 고종 때의 학자인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에 목근화가 무궁화로 쓰인 예를 볼 수 있다. 즉 목근의 중국식 발음은 베이징관화[北京官話]의 경우 <무친(muchin)>과 비슷하게 소리나고, 조선 초기의 운서(韻書)들에 의거해 보면 <무긴> 정도로 발음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자 유입 이래의 한자어는 초기에는 중국식 발음에 의거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한국한자음화됨으로써 중국식의 원음과 한국한자음화한 것이 병존하는 시기를 거쳐, 결국 한국한자음의 음만이 남게 되는데, 무궁화의 경우 <木槿>에 대한 한국한자음이 <목근>으로 정착되는 과정에 상응하여 중국 원음 역시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무궁>으로 변음되어 이중어(二重語)를 형성하게 된다. 중국 원음의 기원을 가지면서 한국귀화음이 된 <무궁>은 <無窮>이란 한자어를 취음함으로써 처음의 <木槿>과는 전혀 다른 한자어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무궁화(無窮花)는 예로부터 쓰여오던 고유어에 한자음을 따서 쓰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김정상(金正祥)은 논문 <무궁화보(無窮花譜)>에서 1923년 전라남도 완도군(莞島郡) 소안면(所安面) 비자리(榧子里)에서는 노인들이 무궁화를 <무우게>라 부르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무궁화라는 꽃 이름은 <무우게>에서 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이양하(李敭河)는 그의 수필에서 호남지방 출신인 친구가 어렸을 때부터 무궁화를 많이 보아 왔으나 그것이 무궁화라는 것은 전혀 몰랐었고 <무강>나무로만 알아왔음을 기록한 바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면 무궁화는 오래 전부터 한국 고유의 다른 이름이 있었으며 이것이 한자 <無窮花>로 취음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일본에서는 <무쿠게[牟久計]>로 부르고 있는데, 무궁화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불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2 국화로서의 내력


한국에 일찍부터 무궁화가 있었다는 것을 전해주는 가장 오래 된 기록은 동양 최고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책에는 <군자국에는 훈화초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君子國 有薰花草 朝生暮死)>라는 기록이 있는데, 훈화초는 무궁화를 가리킨다. 《원중기(元中記)》에서도 <군자의 나라는 지역이 천리인데, 무궁화가 많다(君子之國 地方千里 多木槿花)>라고 하고 있으며, 《고금주(古今註)》에도 비슷한 기록이 전한다고 한다. 또한 신라에서도 최치원(崔致遠)이 지어, 효공왕(孝恭王)이 당나라 소종(昭宗)에게 보냈다는 국서(國書) 가운데 한국을 <근화지향(槿花之鄕;무궁화의 나라)>이라 하였는가 하면, 고려 예종 때에는 고려를 스스로 <근화향>이라 자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보면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군자의 나라 동이(東夷)는 사람들의 민족성이 군자답고, 무궁화가 아름답게 피는 나라>라고 예찬함으로써 한국을 <무궁화 피는 화려강산>으로 인식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시대 광해군 때의 실학자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군자의 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있어 꽃을 피운다>라고 적고 있으며, 숙종 때의 대학자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무궁화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어사화(御賜花)를 내렸는데, 어사화의 장식이 무궁화꽃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무궁화에 대한 날조된 비난과 왜곡이 있었다. 그러나 우호익(禹浩翊)은 <무궁화예찬>이란 글을 통하여 일제의 만행과 왜곡된 허상을 반박하고, 독립의 의지와 민족의 자긍심을 강조하였다. 또한 안창호(安昌浩)■윤치호(尹致昊)■남궁억(南宮檍) 등도 무궁화에 대한 사랑으로 민족정기를 일깨우려 하였다. 국화(國花)로서의 무궁화는, 국기(國旗)나 국가(國歌) 같이 확실한 법규정이나 역사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무궁화는 3000여 년 전부터 민족정서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인용되었고, 더욱이 1948년 정식 채택된 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후렴구를 사용함으로써 국화로서의 의미를 인정 받았다. 또한 입법■사법■행정 삼부(三府)의 표상으로 무궁화가 사용되고, 국기의 봉도 무궁화 봉오리로 제정되어 무궁화는 명실상부한 나라꽃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