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특전 이미지

박희도 전 육군 참모총장 - 도끼만행 이틀 뒤 대통령 특명

구자융 2010. 7. 17. 18:13

 

박희도 전 육군 참모총장.
1934년 경남 창녕생
대구고·육군사관학교 졸업
1988년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1976년 공수여단장
1981년 특전사령관
1983년 군사령관
1983년 육군 참모차장
1985~88년 육군 참모총장(대장)
1992년 효암연구소 소장

박희도(72) 전 육군 대장. 그는 정치적 격변기에 자의든 타의든 신군부의 역할을 수행했던 한시대의 잊혀질 수 없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올해로 30주년이 되는 1976년 8월, ‘북한군 도끼 만행 사건’과 그 원인이 된 ‘판문점 미루나무’를 기습 제거한 제1공수특전여단장으로서 더 유명했던 인물이다.

전 세계가 경악한 도끼 만행 사건은 유엔군으로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유엔군 측 초소를 경비하던 미 육군 보니파스(G Bonifas) 대위와 바레트(T Barrett) 소위가 북한군이 휘두른 도끼를 맞고 사망한 사건이다. 당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이 보고받고 군사적 응징을 즉각 검토하도록 지시할 정도로 분노했던 70년대 최대의 한반도 사건이었다.

더구나 이 무렵은 두 차례나 남침용 땅굴을 파내려 온 사건이 발생한 이후였다. 특히 베트남이 패망하고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된 것에 고무된 김일성이 직접 북한 전군에 훈령을 내려 “77년 안으로 남침해야 한다”며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던 때다. 이런 상황에서 64명의 특전여단 결사대를 이끌고 판문점 미루나무 절단 작전을 감행했던 당시의 비화를 박희도 장군의 직접 육성을 통해 공개한다.

총장님(26대 육군 참모총장으로 재임했기 때문에 총장으로 호칭했다)은 장군으로 진급한 그해에 도끼 만행 사건을 경험하고 미루나무 절단 작전에 투입된 겁니까?

“그렇습니다. 76년 1월 1일자로 준장 진급을 했는데 그해 6월 12일 전두환 장군으로부터 제1공수특전여단의 지휘권을 인계받고 불과 두 달 후에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 것이지요.”

미 국방부에서도 발표했지만 특전요원을 선발해 전쟁을 각오할 정도로 긴박하고 위험한 작전을 개시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특전단 요원들의 평소 훈련이 그런 상황을 가정한 훈련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허허. 일반인들은 상상을 못해요. 내가 지휘했던 제1공수특전여단이 전체 특전여단의 요람이고 산실이었는데, 지상에서부터 고공훈련까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다고 할 정도의 훈련으로 무장을 하지요.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설명이 어려운데, 혹독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공수훈련하고 체력단련은 기본이고 접지(接地)훈련, 막타워(Mock Tower·사람이 제일 공포를 느낀다는 11.3m 높이에서 낙하)훈련, 송풍훈련, 지옥훈련, 거기다가 정보·작전·화기·통신·산악운전·응급처치·심리전 훈련까지 해서 전문성을 배양합니다. 엄청난 고난도 훈련이죠. 상상이 돼요? 허허.”

비무장 작업자들에게 만행

도끼 만행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공동경비구역 상황과 미루나무는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설명이 필요한데요, 어떻게 보고를 받았습니까.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마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유엔군 장병과 한국인 노무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집단 구타당하고 있다. 그 중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 도끼에 찍혀 사망햇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의 공동경비구역 상황은 나로서도 알지 못했어요. 경악할 사건이 일어난 그날 여단 참모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뉴스로 흘러나왔으니까요. 그래서 비상이 걸리면서 그때부터 전체적인 파악을 시작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작전에 들어가는 것은 이틀 후지만 후각적으로 벌써 팍 오는 게 있잖아요. 그래서 모든 정보와 자료를 놓고 분석해보니 상황이 그려지는 겁니다. 내용이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미루나무는 원래 두 그루인데 ‘돌아오지 않는 다리’ 바로 앞에 있는 나무는 작아서 특별한 문제가 없었어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유엔군 측 3초소와 5초소 사이에 있는 미루나무가 수십 년이 돼서 크기도 엄청나게 크지만 경비를 하는데 문제가 됐던 겁니다. 한마디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서 아주 가깝게 있는 유엔군 3초소가 그 미루나무 때문에 시계(視界)가 막히고 있었단 말이에요. 특히 여름만 되면 숲이 우거져서 전방이 전혀 관측이 안 된단 말이오. 또 그 지역이 북한 측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하고 40~50m밖에 안 떨어져 있어서 아주 가깝고. 그렇기 때문에 만약 북한군이 유엔군 3초소에서 무슨 일을 벌이면 5초소에서 조치를 취하고 엄호를 해줘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미루나무 가지를 쳐내려고 들어갔다가 사건이 터진 겁니다.”

처음부터 잘라내려고 들어간 게 아니었군요.

“가지치기하러 들어갔던 겁니다. 그러고 군사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판문점을 찾는 관광객들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역사적인 기념물이니까 그걸 보려고 할 거 아닙니까. 근데 미루나무 때문에 전혀 보이지가 않으니까 가지치기를 해서 주변을 정리할 필요도 있었어요. 그래서 무장도 안 하고 들어간 것인데 작업부와 경비군인들이 중경상을 입고 미군 장교를 둘이나 도끼로 쳐 죽였으니 말이야. 어쩌면 그놈들이 오래전부터 자꾸 도발을 일으키고 시비를 걸어오고 했었으니까 계획적으로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겁니다.”

북한군의 예측하지 못할 도발을 막기 위해서도 미루나무 제거는 절대적인 문제였군요.

“그렇지요. 더구나 그 당시 국제 정세도 미군 철수를 위해 북한이 제3세계 비동맹권 국가들을 상대로 엄청난 로비를 강화해서 ‘비동맹국들의 일치된 결의로 미 제국주의 강점 하에 있는 남조선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식으로 여론을 호도했고 거기다가 마침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카터가 주한미군 철수를 선거공약에 포함시켰어요. 공군만 제외하고 지상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킨다고 했단 말이오. 그러니 우리로서는 아주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지요. 그러고 입만 열면 확성기를 통해 평화공존이니 한민족 어쩌고 해놓고 비무장지대로는 탱크를 몰고 내려오지 않나 공비를 침투시키지 않나, 4월부터 계속 도발을 해왔단 말이오. 그러니 유엔군 측에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고 북한이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시계를 가리고 있는 미루나무를 정리해야겠다고 했던 겁니다.”

도끼 만행은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 도중에 일어난 것입니까.

“그렇죠. 상황이 어떻게 됐느냐 하면, 사건이 일어난 8월 18일 오전 10시30분에 유엔군 측 미군 장교 보니파스 대위 하고 바레트 소위, 한국 노무자 5명, 한국군과 미군이 포함된 유엔사 경비병 8명이 시계를 가리고 있는 그 미루나무에 도착했어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KPA(북한 인민군) 장교 한 명이 다가와서 유엔군 보니파스 대위한테 미루나무를 자를 거냐고 해서 가지치기를 할 거다, 이유는 시계 때문이다, 알았다, 그런 대화를 한다고요. 그게 무비 카메라로 찍어놓은 필름에 다 나와요.

거기 보면 인민군 장교가 오히려 가지치기하는 요령을 잠시 가르쳐주기도 해요. 그런데 10여 분 후에 북한군 트럭이 한 대 오더니 장교 2명하고 사병 10여 명이 다가와서는 가지치기를 무작정 막는 겁니다. 그중에 북한군 박철이라는 중위가 시비를 걸면서 자르지 말라는데 보니파스 대위가 그대로 강행을 하니까 박철이가 자기들 경비초소로 사람을 하나 보내자 인민군 추가 병력이 초소 안팎에서 나타나고 트럭까지 달려왔는데 증원군이 한 20명 온 겁니다. 순식간에 ‘죽여라’ 소리치면서 난장판이 벌어지고 가지를 치던 우리 노무자 도끼를 빼앗아 무자비하게 살해한 겁니다. 그런 과정에서도 인민군 장교 하나는 쓰러진 유엔군 손목시계를 풀어 자기 주머니에 넣고 말이지요.”

바레트 소위도 현장에서 사망하고 작업자와 한국군도 중상을 입었지 않습니까.

“비무장 상태로 작업을 나갔으니까 전부 당한 거지요. 원래 비무장지대 판문점 내에서는 규정이 권총 외엔 휴대할 수 없도록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규정대로 권총이라도 소지했으면 상황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데 작업을 하러 가니까 권총도 안 찼어요. 완전히 당한 거지. 저놈들은 곤봉에 무장까지 하고. 그래서 보니파스 대위를 도끼로 찍어 두개골이 파손될 정도로 잔인하게 죽였고, 그런 상태에서 그나마 피를 흘리면서도 유엔사 경비병들 하고 우리 노무자들이 보니파스 대위를 싣고 나오는데 바레트 소위가 안 보이더라는 겁니다. 찾으니까 바레트도 이미 저쪽에 쓰러져 있고. 그런데도 인민군 그놈들이 유엔사 경비병들을 계속 죽이려고 달려드니까 우리 운전병이 차를 몰고 돌진해서 그나마 겨우 멈칫하는 사이에 바레트 소위도 싣고 나온 겁니다.”

8월 18일 밤 朴대통령이 극비 명령

북한군이 그런 무자비한 행동을 할 때는 목적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당시 상황을 어떻게 분석했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있겠소? 지금도 김정일이가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의 하나로 미군에 대한 철천지원수, 이걸로 전 인민들한테 적개심을 심어주면서 정권 유지를 하는 거고. 김일성 때도 지금하고 마찬가지로 북한의 지상 목표가 적화 통일인데 그걸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막고 있기 때문에 미군을 척결했다고 인민들한테 알리면서 사상 무장을 강화했겠지요. 아마 지금은 내부적으로 진퇴양난에 빠져있을 겁니다. 공산권도 무너졌고 맹방이라는 중국도 예전 같지 않고 그렇다고 그동안 해온 짓이 있는데 미국에 미소를 보낼 수도 없고, 사면초가일 겁니다.”

이제 사건 직후의 특전사 활동을 회고해 주시죠.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특히 총장님이 지휘했던 부대의 특전사 활동이 주목받게 된 것인데, 군의 동향은 상당히 긴장된 상태 아니었겠습니까.

“8월 18일 오후부터 전군에 비상 태세가 발령돼 있었어요. 상부의 전문은 모든 병력을 영내에 대기시키라는 거였지요. 여차하면 나간다 이거지. 우리 특전사는 비상이 걸리면 눈빛이 더 살아나는데 미군이 도끼로 살해됐다니까 이건 뭐 그냥 둘 수 없다는 거지요. 솔직히 ‘김일성의 머리를 도끼로 까야겠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시민들도 흥분했다고…. 언론에 나왔지만 그때 일반적인 동향이 그랬습니다. 매번 당하고만 있었는데 이번에는 무슨 조치가 있어야 되겠다, 미군도 무슨 조치를 해야 할 거다, 우리 정부도 김신조가 나타났을 때 당하고만 있었는데 계속 당하고만 있겠느냐, 반드시 응징이 필요하다, 완전히 그런 분위기였어요.”

8월 19일 박 장군은 합참 본부장으로부터 호출 명령을 받는다. 중간 계통을 거치지 않고 합참 본부장이 박희도 특전여단장을 직접 호출하는 것은 전례가 없었다. 그만큼 막중하고 보안을 지켜야 하는 임무라는 의미였다. 합참 본부장은 “특공작전을 준비하고 명령을 기다리라”고 하달했다. 대통령의 극비 명령이라는 것이다. <계속>
“총 가진 북한군을 태권도로 막아라”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② 판문점 미루나무 제거 작전 때 미군 측서 말도 안 되는 작전계획 내놔
이호 객원기자·작가 leeho5233@hanmail.net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
8·18 도끼만행 사건은 한국과 미국을 민첩하게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잔인한 만행에 대해 극도의 분노를 나타냈다. 전 국민이 북한의 만행으로 들끓고 있던 8월 20일. 육군 제3사관학교 제13기 졸업식에서 당시 서종철 국방장관이 대독한 훈시를 통해 지금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겠지만 ‘미친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언제나 일방적으로 도발을 당하고만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함으로써 강력한 응징을 예고했다.

그 시각에 미국도 여러 단계의 응징 방안이 검토되고 있었다. 공개된 워싱턴 특별대책회의(WSAG) 자료에 의하면 8·18 도끼만행이 유엔사령부를 통해 미국에 보고된 것이 워싱턴 시각 18일 0시쯤, 두 시간 후인 새벽 2시쯤 주한 미 대사관을 통해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보고했다. 키신저 장관은 즉각 포드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곧바로 1차 WSAG가 새벽 4시에 열렸으며 그 내용은 강력했다. 미 국방부가 76년 8월 25일자로 발표한 언론 브리핑을 보면 당시 군사적 대응의 강도가 읽혀진다.

<(전략)… 8월 21일 오전, 키신저 국무장관이 주재한 WSAG 결정에 따라 판문점 공동감시구역 내 미루나무를 절단하기 위한 ‘폴 버년’ 작전이 극비에 전개됐다. 작전에는 16명의 절단 작업요원을 제외한 64명의 대한민국 육군 특수부대 장병들이 투입됐으며,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동안 오전 7시18분쯤과 7시30분쯤, 북괴가 불법적으로 가설했던 북괴 측 제5, 제6 초소 앞 도로 차단기 2개도 순식간에 제거했다. (중략) 작전이 전개되는 동안 태평양함대 사령부는 핵 항공모함인 엔터프라이즈호와 레인저호에 계속 서진(西進)을 명령했고, 일본에 머물고 있던

미드웨이호는 한국 해역에 도착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괌과 미 본토에서 급파한 F-111 편대 및 건십 헬리콥터와 F-4 전폭기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비무장지대 근접 비행을 했으며 3대의 B-52 중폭격기가 비무장지대 남쪽에서 선회했다….>

이러한 군사적 행동 외에도 당시 주미 ‘중공 연락소장 황진(黃鎭)’을 불러 북한의 만행을 응징하겠다는 외교적인 조치도 병행했다. 그리고 B-52 전략폭격기가 공동경비구역(JSA) 깊숙이 들어가 레이더 교란용 금속 부스러기를 떨어뜨리며 북한 초소를 포함한 미루나무에 폭탄을 투하한다는 계획까지 세운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국이 전쟁을 먼저 일으켰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포드 대통령이 포기했지만 그만큼 강력한 의지를 지녔던 것이다.
이때의 작전명은 ‘폴 버년’. 버년은 도끼 하나로 단 한 번에 나무 81그루를 자르고 도끼로 세인트로렌스강을 팠고, 미시시피강에서 로키산맥까지 솟아있는 나무들을 전부 제거해 대평원을 만들었다는 미국의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돼 있다. 아마 그래서 북한의 도끼만행에 미국의 버년 도끼로 응징하겠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때 박 장군의 투입은 유엔군 사령관의 지시로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게 의미가 있는 질문인데, 군사작전권은 유엔군 사령관이면서 주한 미군 사령관인 스틸웰 대장이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사태의 심각성이 있잖아요. 그러니 사령관이 결심을 해서 그걸 미국 대통령한테까지 결심을 받아냈어요. 맨 처음 대응은 이미 밝힌 대로 미군 장교 두 사람이 도끼로 맞아죽었다니까 미국 전역이 분노로 들끓고, 그래서 항공모함 전단까지 출동해 군사적으로 대규모 응징을 한다는 쪽이었어요. 그러다가 미루나무 제거로 바뀐 거지만. 그런데 작전을 수행하기 전에 사령관이 우리 박 대통령께도 보고를 드릴 거 아닙니까. 이렇게 작전을 할 계획입니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한국군 특수부대도 같이 투입을 하시오. 이렇게 돼서 우리 특전단이 선발된 겁니다.”

스틸웰 사령관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한국으로서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지만 군인으로서도 철저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 근무가 군인으로서 마지막이었고 38년간의 군복무를 끝으로 퇴역이 결정된 상태에서 부인과 휴양차 일본으로 여행하던 중에 도끼만행 사건이 터졌다. 그러자 사령관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상황실에 도착한 것이 18일 오후 8시였다. 합참본부에서도 놀랍다고 했다. 그리고 즉각 워싱턴, 국방부, 하와이 태평양사령부와 교신하면서 숨가쁘게 대응조치를 지시한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인 작전 지시는 언제 어떤 내용으로 받았습니까.

“그게 합참 본부장을 만나고 돌아온 다음날이에요. 8월 20일이지. 작전 내용도 투입되기 몇 시간 앞두고 또 달라지고 그랬는데 그게 나로서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만들고 말이지. 우리 대원들 생사가 걸린 문제니까. 굉장했어요. 나중엔 사령관하고 붙기도 하고 말이오. 좌우간 20일 아침인데 그날은 합참 본부장이 아니고 합참의장하고 참모총장이 예고도 없이 직접 특전여단 내 방으로 찾아오셨어요. 그때 노재현 대장이 합참의장이고 이세호 대장이 육군참모총장인데 누구 차로 오셨느냐 하면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신현수 소장도 같이 왔는데 그 차로 오셨거든? 그

러니까 보초가 정신을 못 차리는 거요. 차가 쑥 들어오는데 보니 안에는 4성 장군이 탔는데 차는 2성 장군 별판이더라 이거지, 하하하. 그러니 보초가 어떻게 보고를 하느냐, ‘지프가 들어왔는데 안에 장군이 많이 탔습니다!’ 이거야, 하하하. 그래서 나가 보니까 참모총장하고 합참의장이 내려요. 그러고서 내 방에 앉아 지시를 하는 겁니다. 보안을 유지하라. 미루나무 제거작전에 돌입하는데 미군이 들어간다, 거기에 특공작전을 펼 수 있는 우리 정예요원을 같이 투입해 작전을 수행한다, 상세한 것은 스틸웰 사령관의 지시를 받아라, 이게 최초의 명령입니다. 결과적으로 64명을 투입하는데 64명을 총장이나 합참의장이 결정한 게 아니고 JSA에 투입되는 총원이 110명이라니까 내가 만약의 사태에 대응하려면 64명은 필요하다고 판단을 했던 겁니다.”

작전 내용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은 겁니까.

“목적만 알면 작전은 내가 세우는 거지요. 미루나무 제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총장님 오셨을 때 내가 물었지요. ‘무장은 어떻게 합니까.’ ‘기본무장은 하고 가야 되지 않겠느냐.’ 기본 무장이라는 건 권총밖에 소지를 못해요. ‘저는 어떻게 합니까.’ ‘작전참모부장이 따라가든지 당신이 가든지 그건 알아서 해.’ ‘그럼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까지도 미군의 구체적인 작전은 모릅니다. 왜냐하면 작전 총책임자가 비무장지대 기갑부대 빅터 비에라 중령이에요. 그러니깐 나중에 알게 되는데, 그게 나를 미치게 하는 겁니다. 왜냐, 우리 특수요원(64명)을 미군 대대에 배속시키고, 미루나무를 자르면 도끼만행 사건 때처럼 저놈들이 또 달려들 거다, 그때 64명이 빙 둘러서서 태권도로 막아라, 이게 맨 첨에 우리한테 통보해준 역할이고 임무예요. 기가 막힌 거지요. 저놈들이 어떤 무기를 사용할지도 모르는데 태권도로 막으라는 소리 아닙니까?”

작전 지휘를 스틸웰 사령관한테 받으라고 했다면 직접 만나서 들은 겁니까.

“당연하지요. 합참의장하고 총장이 돌아가고 얼마 안 됐는데 8군에서 연락이 와요. 그래서 연락장교를 보냈더니 그날 저녁에 바로 미군 ‘레크리에이션 센터 넘버4’인가? 문산 부근 미군부대로 오라는 겁니다. 그게 저녁 8시예요. 8·18 사건이라서 그랬는지 8자하고 연관이 많더라고. 그래서 식사도 할 겸 미군 캄보이 한 대 오고 우리 버스 2대에 필요한 대원들 태워서 갔어요. 그때부터 분위기 좋은 식사는커녕 긴장이야. 사령관의 첫마디가 작전을 개시할 때 절대 무장은 안 된다는 겁니다. JSA에는 비무장지대의 협정에 의해 권총만 소지할 수 있으니까 특전단 요원들의 기질은 알지만 장총이나 실탄 등을 절대 휴대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원래 비무장지대는 총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미군 장교가 도끼로 맞아 죽은 것도 비무장으로 들어갔다가 당한 건데 이번엔 가지치기도 아니고 아예 미루나무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버리는 작전을 하면서 비무장으로 도수방어만 해야 한다니 말이 됩니까?”

공산군들이 도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소련의 10월 혁명 때 레닌과 함께 활약했던 트로츠키가 스탈린과 맞서다가 실패하고 망명 생활을 할 때도 있었다. 그는 스탈린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도끼로 맞아 죽었다. 트로츠키가 아내의 무릎에 파묻혀 숨을 거두면서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죽일 수 있는가. 혁명노선과 이데올로기가 인간보다 잔인한가’라고 했던 말은 유명하다.

사령관한테 무장해야 한다는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했지요. 작전회의에서 분명히 스틸웰 사령관한테 위험성을 지적했어요. ‘저놈들이 먼저 쏘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우리가 추가적인 액션을 취할 거요.’ ‘죽은 다음에 추가적인 액션이 무슨 효과가 있습니까.’ ‘장군은 가상적인 얘기를 반드시 일어날 것처럼 말하지 마시오. 절대 무장은 허용할 수 없소!’ 이러니 더 이상 항변을 못하는 겁니다. 무조건 안 된다는데?”

도끼만행이 있었으니까 최소한의 방어용 무장은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입장 아닙니까?

“협정으로 막아놓고 있는데 사령관 앞에서 무장을 하겠다는 소리는 할 수 없지요. 사령관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 특전단 정예요원들을 투입한다는 건데. 무슨 얘기냐 하면 우리 특전사 요원은 전원이 태권도 2,3단짜리요. 그래서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대신 특전 요원들이 도수방어를 하라는 개념이란 말이오. 그리고 유병현 합참 본부장도 나한테 태권도 유단자로서 투창도 할 줄 알고 도수방어로 단련된 요원들을 선발해서 명령을 기다리라고 했었거든.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못하겠다 이거지요.
작전 내용을 보니까 전기톱으로 5분 내에 미루나무를 절단해버리고 10분 내에 작전을 종료하고 귀대한다는 걸로 돼 있지만 그건 사령관하고 미군 측 생각이지. 그런 살벌한 상황에서 몽둥이만 가지고 들어가서 저놈들 총에 맞아 죽고 나면 그게 무슨 좋은 결과가 되겠느냐 말이오.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어요. 그렇지만 사령관한테 얘기를 할 수가 없으니까 밤 12시가 넘어서 우리 김수창 대위를 작전회의에 참석시키고 작전참모하고 나는 돌아와 버렸어요.”

결국 사령관 주장 그대로 변경 없이 개시하는 걸로 된 겁니까.

“그게 또 아니었다고. 사령관도 처음에는 64명이 미루나무를 빙 둘러싸고 절단을 하는 동안 북괴군들이 접근하거나 방해를 못하게끔 하는 걸로 얘기를 했잖아요? 그런데 새벽 2시쯤에 돌아온 김수창 대위가 작전개념이 변경됐다는 겁니다. 미루나무를 자르는 그 주위는 미군들이 둘러싸고 우리 1공수 요원들은 외곽지역 돌아오지 않는 다리 저 바깥 경비를 맡으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건 북괴 초소 코앞에서 맡으라는 얘기요. 확 돌두만. 거기서 내 결심이 선 겁니다. 이건 무조건 살고 이겨야 된다, 보복을 해야 되겠다 하는 것도 있었지만 우리 특전요원들이 붙으면 무조건 갈겨야 되겠다,
그런 개념에서 핏발이 서고 작전 방안이 머리에 그려지는 겁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있으면 저놈들이 총을 안 가졌다고 어떻게 단언을 하며 총 한 대 맞고 난 다음에 태권도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태권도도 몸에 닿아야 하지 총 맞은 다음에 태권도 하나? 전쟁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총을 누가 먼저 쏘았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요. 우선 이기고 봐야 하고 우리 병사들이 안 죽어야 되는 거 아니요. 다 죽고 다 깨졌는데 네가 어쨌느니 내가 어쨌느니, 지휘자한테는 구질구질한 변명밖에 안 되는 거고 있을 수가 없다 이거요. 그런 생각이 드니까 밤새도록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궁리를 하는 겁니다.”
스틸웰 사령관이 박희도 장군을 자극한 셈이었다. <계속>
“많이 죽일수록 훈장 많이 주마”
박희도 전 육군 참모총장 ③
합참의장 겉으론 “절대 안 된다”면서 무장 묵인… 샌드백에 M16 넣어
이호 객원기자·작가 leeho5233@hanmail. net
박희도 전 육균참모총장
작전 개시를 눈앞에 두고, 무장이냐 비무장이냐로 제1공수특전여단 박희도 장군과 스틸웰 유엔군 사령관은 극도의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박 장군으로서는 비무장 상태에서 미군 장교가 도끼로 맞아죽은 사건이기 때문에 어떡하든 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하지만 스틸웰 사령관은 절대 불허다. 스틸웰 사령관을 만나고 돌아온 8월 20일, 박 장군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스틸웰 사령관을 만나고 온 그날 밤에 바로 결심하신 겁니까.

“그랬어요. 총을 가지고 들어가자. 무장을 시킨다. 내가 옷을 벗으면 될 것 아니냐. 공격을 받아 부하의 죽음을 보는 것보다 이기고 내 계급장을 떼는 것이 차라리 떳떳하지 않으냐. 그게 지휘관의 덕목 아니겠느냐.”

무척 어려운 결심이었겠습니다. 상대가 작전권을 가진 유엔군 사령관인데.

“그런 결심은 누구도 할 수 없어요. 내가 해야만 하는 겁니다. 결심은 섰다. 그럼 어떻게 무기를 보이지 않게 가지고 들어갈 것이냐, 어떻게 작전을 해야 할 것이냐, 북한 초소를 코앞에 두고 외곽 경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되잖아요. 잠이 오지 않아요. 부하들도 전부 비장하고. 내가 봉화관으로 내려갔어요. 대기하고 있는 특공요원들을 보니 벌써 명예스러운 특전단 마크, 이름표, 계급장을 전부 떼어내고 호주머니에 있던 것들까지 다 꺼내놓았더라고. 결연하고, 요원들도 붙는 걸로 각오하고 있는 겁니다.”

무장 사실이 발각되면 작전이 전면 중단되거나 변경될 수도 있는 상황 아닙니까.

“중단되거나 변경되는 건 고사하고 사령관 지휘 명령을 어겼으니 내가 군복을 벗거나 영창에 갈 수도 있는 거라니까. 다만 우리 총장은 내 뜻에 동의하실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건 공개할 수 없는 거지만 합참의장하고 총장이 오셨을 때 딱 한마디 하시는데, 놈들하고 붙어서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훈장 많이 주마, 그랬다고요. (웃음) 그건 무장을 하라는 얘기 아니오. 저놈들이 살벌하다는 거지. 좌우간 고민을 하는데 마침 미군에 연락을 해보니까 트럭을 타고 들어가는데 샌드백은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고 그러는 겁니다. 이게 아이디어예요. 우선 은폐물이 있어야 하잖아요. 저쪽에서 총알이 날아오면 총알을 일단 차단한 상태에서 우리도 쏠 수 있어야 하니까 샌드백으로 차단막을 만들겠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때부터 앉는 의자에다가 샌드백을 전부 쌓았어요. 그게 ‘M16 샌드백’이오. 샌드백 속에 M16을 2개로 꺾어서 넣은 거야.”

발포할 상황을 미리 지시해 두는 겁니까.

“물론이지요. 비무장 지대니까 조심해야 하고 미묘한 게 있어요. 그리고 발포 상황만 지시하는 게 아니라 대여섯 가지 지시가 있어요. 문제가 생겼을 땐 모든 책임을 내가 종결시킬 테니 요원들은 침묵한다, 어떤 경우든 미군들과 충돌을 일으키지 마라, 어떤 경우든 놈들에게 납치되지 마라, 그리고 저놈들도 10만 특수8군단이 있고 전부 특수훈련을 받고 했을 테니까 얼마만한 거리에서 쏴라. 나중에 들어보니 우리 특공대장은 멀리 있더라도 놈들이 움직이면 쏴라,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서 우리 쪽으로 오기만 해도 쏴라, 그랬더구먼.”

아니, 단장으로서 직접 현장 지휘를 하시지 않은 겁니까?

“할 수가 없게 돼 있어요. 그래서 무장도 더 시켰는데, 우리 특공대가 미군 비에라 중령의 지휘를 받으니까 내가 작전의 지휘선상에 설 자리가 없는 거지요. 참모총장한테는 내가 직접 따라가면서 지휘를 하겠다고 했고 승낙도 받았는데. 그러니 극비리에 내가 지휘할 수 있는 위치를 물색해 놓긴 했지만 그래도 같이 못 들어가니까 피가 말라요. 나는 저놈들이 사격술도 좋을 것 같고 우리 요원들이 놈들의 5,6,7,8초소까지 제거하려면 최소한 7~8명은 죽을 거다 생각을 했거든. 그러니 더 피가 마르고 못 견디겠더라고. 그래서 특공대장 김 소령을 불러가지고 만약 우리 대원 하나라도 희생되면 북한 초소 안에 있는 놈들까지 모조리 제거하라고 그랬지.”

64명은 어떤 기준으로 선발한 겁니까.

“그때 내가 부임한 지 두 달밖에 안 됐기 때문에 대원들 신상을 완전히 파악한 상태가 아니거든. 그런데 김택수 중령이 작전보좌관으로 데리고 있던 김종헌 소령을 추천해요. 만나보니까 상당히 담력도 세고 작전 지휘도 잘하고 머리도 잘 돌아갈 것 같아. 그래서 김 소령을 특공대장으로 정해놓고 김 소령한테 선발하라고 했지요. 장남 빼고, 장가 간 사람 빼고, 독자 빼라. 근데 전부 지원을 해. 굉장히 감격했어요. 특히 김 소령은 너무 고맙고 정말 감사했어. 그때가 신혼 초래. 작전 마치고 와서 부인한테 손톱·발톱 깎아서 넣은 봉투를 보여주며 얘기하니까 부인이 기절했다고 그래요. 그게 우리 특전요원이오.”

마침내 동이 튼다. 문산 부근 모 미군부대로 특공대를 이동시키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작전은 예정대로 7시. 박희도 장군은 이 순간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공동경비구역(JSA)으로 가는 전진기지 키티호크에서 요원들을 넘겨주고 그는 극비로 마련한 위치에서 잠복해야 했다. 다만 감청장비로 상황을 보고받고 지시할 수 있을 뿐이다.

이윽고 7시, 무장은 은폐시킨 상태로 JSA 진입에 성공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잠깐이었다. 북한군 7초소가 유엔군 2초소와 들어가는 입구에 같이 있었고, 특공대가 북한군 초소를 보는 순간 박 장군의 명령까지 가세해 단숨에 초소를 초토화시키는 것이다.

“탐색을 하니까 인민군들이 밤낮 7초소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작전지역에 들어가면 그 초소를 순식간에 부수고 걔들을 전부 사살하라고 명령을 내렸단 말이오. 그런데 그놈들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낌새를 차렸는지 전부 초소를 비우고 없다는 거요.”

▶1976년 8·18 도끼만행 사건 직후 노태우 9공수여단장, 전두환 1공수여단장, 스틸웰 주한 미군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당시의 직책·앞줄 왼쪽부터) 등이 작전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교전이 없었으니 천만다행이었지만 문제는 합법적인 초소를 때려부쉈다는 것과 내친김에 막 나간 것이었다. 거기다가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미군들이 특공대에게 시간을 더 늘려준 셈이 됐다. 5분이면 작전을 종료한다고 했던 것이 착오였다. 8월의 잔뜩 물을 먹은 나무는 쉽게 절단이 안 된다는 것을 미처 미군이 몰랐던 것이다. 전기톱이 계속 멈춰지고 아름드리 미루나무에 톱날이 끼여 서너 개나 부러졌다. 마음은 급하고 톱날은 더 부러지고. 그 사이에 특공대는 눈앞에 있는 초소로 돌진했고 갑자기 들이닥친 광경에 놀란 인민군들이 우왕좌왕했다. 그들은 상부에 보고하는 것 같더니 삽시간에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으로 200여 명의 인민군이 나타났다. 그런데 총을 소지하고 있으면서도 특공대원들의 광기에 질렸는지 다리를 사이에 두고 건너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건너왔으면 모조리 사살했을지 모른다. 특공대들은 기가 살았다. 아직도 나무는 절단되지 않고 있다. 특공대는 차단기까지 뽑아버리고 다리 이쪽에 있는 초소는 닥치는 대로 더 때려부순다. 그때다. 갑자기 통신 스피커가 요란해지고 상황실로 보고하는 미군의 고함이 박 장군의 감청기에도 들려왔다.

“미쳤다! 특공대가 전부 미쳤다! 다 때려부순다! 전부 완전무장이다! 수류탄까지 입에 물고 돌진하고 있다!”
“안 돼! 갓 댐!(God damn) 막아라! 수류탄을 빼앗아라!”
“완전히 미쳤다! 북괴 차단기도 뽑아버렸다! 미쳐 있다! 어디까지 나갈지 모른다!”

화급하게 악을 쓰듯 보고하는 미군의 교신 내용이 감청기에 잡히자 박 장군과 작전참모도 벌떡 일어났다. 이미 왕왕거리며 토해내는 스피커는 정확한 내용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뒤섞여 상황 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다.

“교전이 붙었나!”
소리를 내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놈들의 무장이 뭐냐! 개인화기냐! 탱크냐!”
여전히 반응이 없다. 피가 마른다. 이미 갈겨대고 있기 때문이라는 판단에 박 장군은 마냥 기다릴 수가 없다.
“차를 대기시켜라! 내가 들어가겠다!”
“안 됩니다! 종결을 단장님이 짓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같이 들어가면 누가 종결짓습니까!”
미루나무가 쓰러졌다는 외침도 아직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나중에 알았지만 7초소를 뭉개버리고 나니까 5,6초소 앞에 저놈들이 설치한 도로차단기가 있더라는 거요. 그것도 뽑아버리고 미루나무 절단이 계속 늦어지니 잘됐다 하고는 그 사이에 나머지 초소로 쳐들어가서 전화선도 다 뽑아버리고 전화기도 부숴버리고 초소의 커튼도 뜯어버리고. 그 커튼은 나중에 우리 1공수 기념관에 놔뒀었는데…. 닥치는 대로 전기선도 뽑아버리니까 불이 번쩍번쩍 터지고 말이지. 결국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안쪽에 있는 북한 초소는 모조리 뽑고 쓰러뜨리고 짓뭉개버린 거야.”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작전이 전개되는 동안 바깥에서는 긴장 그 자체였다. 전군에 비상이 걸렸고 데프콘3 상태에서 미군들은 모든 문서를 후방으로 이동할 준비까지 해놓고 있었다. 국방부도 육군본부도 마찬가지였다.

야전부대에서는 완전히 공격 직전 상태였다.
“그때 나는 몰랐는데 작전 끝나고 보니까 우리 특공대가 한 사람이라도 당하면 즉각 공격할 수 있도록 1사단 수색병력이 배치돼 있었고 공중에는 미 폭격기들이 날고 B-52가 떠있었어요. 또 미2사단장이 헬리콥터를 타고 공중에서 지휘했고. 굉장했지. 전쟁 예비물자도 그때까지 한 번도 손대지 않았었는데 전부 박스를 뜯고 말이지. 미군들이 문서를 후방으로 옮길 준비를 했다면 말 다했지 뭐.”

문제는 작전 종료 후 스틸웰 사령관의 분노 아니었겠습니까.

“허허. 작전이 끝나고 난 다음에 미2사단에서 작전 분석회의를 하는데 스틸웰 사령관이 굉장히 화가 났지요.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 이건 지휘권에 대한 도전이다!’라고 길길이 뛰었어요.
그래서 우리 합참의장에게 문책하라는 서한을 보냈어요. 그래서 감찰조사가 나왔는데 육군본부 작전처장이 위원장이고 나하고 특공대장이 신문을 받는 겁니다. 눈 감고 아웅 식이지만 기분은 좋을 게 없잖아요. 그래도 뭐 명령이니까 받았지. 왜 총을 가지고 들어갔느냐고 물어. 변명은 해야 되잖아요. ‘작전을 하다 잘못하면 북괴한테 포로가 될지도 모르니까 붙들리면 자살하려고 가지고 들어갔다’ . 허허허. 다른 얘기는 안 해도 서로 아니까. 다만 사령관 체면이 있어서 특공대장 김종헌 소령을 잠시 보직 해임시키는 행정조치로 마무리지었어요. 훈장을 주기는커녕 처벌을 받는 방향으로 돼버렸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하사금을 내려보내 걸쭉하게 회식을 하도록 했다. 그때 돈 50만원이었다. 대통령은 치하의 뜻을 전하면서 ‘김일성이가 본의 아니게 유감스러운 일이 됐다고 사과를 했다’는 내용도 알렸다. 설령 훈장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특전요원들에게는 국민이 달아주는 훈장이 있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