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성구씨(綾城具氏) 안동시(安東市) 와룡면(臥龍面) 지내리(池內里, 모사골) 마을-안동시(安東市) 와룡면(臥龍面) 지내리(池內里, 모사골) 마을
안동시에서 온혜, 도산서원, 명호면으로 가는 35번 국도를 주행하여 와룡면 소재지에 이르면 곁하는 마을이 곧 안동시 와룡면 지내리(池內里)이다. 과거에 지내리는 안동 세거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이름난 조선조 문신이며 학자인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1526∼1586)이 태어나 성장한 곳으로 거기에 사당과 구택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흔적만 남았을 뿐 능성구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지도 않으며, 가까운 문중 후손이 어디서 사는지 모른다. 그 후손이 아닌 처지로 불천위(不遷位)인 구봉령의 제사를 어디서 누가 어떻게 받드는지를 지금 필자가 나서서 살펴볼 처지가 아니라 알 방도도 없다.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시조는 고려 때 삼한삼중대광검교대장군(三韓三重大匡檢校大將軍) 구존유(具存裕)라 한다. 1224년 송(宋)이 몽골에 패망하자 금성(金城, 현 나주)으로 망명해 왔다가 뒤에 능성(綾城, 현 화순)에 세거하게 되어 후손들이 이를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구존유를 비롯하여 그 후손이 대대로 고려조정에 진출하여 명성을 높였다. 7세손으로 송은(松隱) 구홍(具鴻)은 우왕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으나 조선 개국에 협력하지 않고 두문동으로 들어가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1403년(태종3년) 좌정승에 추서되고 시호 문절(文節)이 내려졌다. 구홍의 묘소와 사우는 개성에 있고, 맏아들 구종지(具宗之)의 후손들도 개성 지방에 거주하고 있다. 안동 지방에 정착한 능성구씨는 구홍의 넷째아들 구종수(具宗秀)의 후손들이다.
안동의 능성구씨는 시조 구존유의 7세손 구홍을 파조로 하는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의 후손 구익명(具益命)이 안동으로 이거해 오면서 시작된 세거 성씨이다. 구홍의 넷째아들 구종수는 합천인 이중경(이중경)의 사위이다. 이중경은 세종 7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역임하였고 이중경의 손자 쌍봉(雙峰) 이복로(李福老, 1496∼1533)는 영양인 남팔준(南八俊)의 사위가 되어 안동 일직(一直)에 정착하였다. 구종수의 아들 구익명(이중경의 외손자)이 청주인 정약(鄭若,형조좌랑)의 사위가 되어 면천(沔川,당진군)에서 안동으로 이거하여 와룡면 지내리(池內里)에 정착하게 되었다.
구익명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맏아들 구인충(具仁忠)은 후사가 없었고 셋째아들 구인신(具仁信)과 넷째아들 구인정(具仁貞)의 후손들은 각각 용궁과 영양에 거주하고, 안동에는 둘째아들 구인서(具仁恕)가 권자경의 사위가 되어 그 후손들이 계속 거주한다. 구인서의 증손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1526∼1586)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0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내고, 시호가 문단(文端)이다.
안동 정착 능성구씨들이 자랑하는 역사 인물은 단연 백담 구봉령이다. 이 지역 사람들이 퇴계 선생의 수제자 4인을 쏜꼽을 때 유서애(柳西厓)와 김학봉(金鶴峰)과 조월천(趙月川)의 다음을 구백담(具栢潭)을 드는 예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구봉령은 자는 경서(景瑞), 호는 백담(栢潭). 문정공(文貞公) 구위(具褘)의 8세손이며 구겸(具謙)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처음에는 가학(家學)으로 이조참의를 지낸 재종숙 구간(具幹)에게 기초 학문을 배운 다음 외종조(外從祖) 권팽로(權彭老)에게 소학(小學)을 배워 문리를 터득하게 되었는데 총명이 뛰어나 제1권을 마친 후 나머지는 홀로 그 뜻을 해득하여 세인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6세에 논어를 읽다가 “먹는 데 배부른 것을 구하지 말고 거처하는 데 편안한 것을 구하지 말라.”는 구절에 이르러 분연히 깨달은 점이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사람이 능히 자립하지 못하는 것은 포식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까닭이며, 진실로 이런 세속적인 것을 초탈한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리.”라 하며 성현이 될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20세 되던 해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를 한번 본 퇴계선생은 뛰어난 문장력과 깊고 넓은 학식을 칭찬하고 “나는 젊은이에게 더 가르칠 것이 없으니 어찌 스승노릇을 할 수 있으리요.”하면서 사양했다고 한다. 구봉령은 여기서 물러나지 않고 더욱 예의를 다하여 “천학(淺學)한 소생이 능력이 없어 거두어 주시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저를 과대평가해서 박대한다면 몸 둘 바를 모르겠으니 제발 제자로 받아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이로써 맺어진 사제관계인지라 이들의 사이는 자별했다. 21세 때인 명종 1년(154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6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니 그의 문명이 조야에 넓게 퍼졌다. 조정의 인사들이 구봉령을 가리켜 3대(堯舜禹) 인물 같고, 양한(兩漢, 前後漢)의 문장에 비유하였다.
급제 후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봉교(奉敎),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이르렀다. 1564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여 수찬(修撰), 호조좌랑(戶曹佐郞),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1567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후 정언(正言), 전적(典籍), 이조좌랑(吏曹佐郞), 사성(司成), 집의(執義), 사간(司諫)을 거쳐 1573년 직제학(直提學)에 올라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대사성(大司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충청도관찰사, 대사간(大司諫), 이조참의(吏曹參議), 형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한때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으며, 당시는 동서의 붕당이 시작되던 무렵으로 중립을 지키기에 힘썼으며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또한 혼천의기(渾天儀記)를 짓는 등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만년에 정사(精舍)를 세워 후학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였으며 죽은 후에는 정사 동쪽에 학도묘(學徒廟)가 세워졌다. 시호는 문단(文端)으로서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담문집(栢潭文集)과 그 속집(續集)이 있으며, 이준(李埈)이 찬(撰)한 묘갈명(墓碣銘)이 전한다.
서애 유성룡이 구봉령 사후 지은 제문(祭文)에서 “비록 세상의 도(道)가 어지러워 염려가 있었으나 오직 공을 믿어 두려움이 없었다.”고 기술했다.
한번은 경상감사 정지연(鄭芝衍)이 병으로 사직하자, 선조임금은 영남은 큰 도이고 섬나라 왜구의 침범이 잦은 곳이므로 문무를 겸비한 사람을 천거하라고 대신들에게 일렀다. 대신들은 구봉령, 이이(李珥), 김여경(金餘慶), 이산해(李山海), 허엽(許曄)의 순으로 추천했다. 이때 허엽의 연령이 제일 높다는 이유로 그가 발탁되었지만 당시 구봉령이 조정 내에서 차지한 신망이 남달리 두터웠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그가 성균관의 대사성을 맡아 해이한 유생들의 교풍을 바로잡고 도리로 훈도하자 선비의 풍도가 크게 변하여 학문을 제대로 성취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를 본 조정대신들은 왕에게 “선비의 학습태도가 진보하지 않는 것은 스승의 도가 서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제 진정한 사표를 얻었으니 오래 맡기어 학문이 융성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아뢰었다.
구봉령의 학문골격은 성경(誠敬)이다. 시와 문장 그리고 경학(經學)에 능하였던 그가 성리학의 요체인 성경에 심취한 것은 이황을 만나고부터이다. 이를 보면 구봉령 역시 정통 정주학을 신봉한 주리론(主理論)을 지지한 성리학자였다.
현재 와룡면 지내리 모사골에 있는 백담의 옛 기지에는 사당만 남아있고 구봉령을 제향했던 주계서원(周溪書院) 역시 대원군 때 훼철되어 주춧돌만 남게 되었으며, 현재 구봉령의 후손으로 안동 지방에 살고 있는 가구 수는 매우 적다. 물론 마을다운 면모의 집성촌 또한 없다. 그러던 중 주계서원은 현대에 이르러 중가구리에 재건되었다.
관련 유적으로는 백담 구봉령의 묘소가 안동댐 주진교 약 500미터 전방 도로 왼편에 있고,와룡면 지내리 모사골에 구봉령의 사당과 구택 호도정(胡桃亭)이 있으나 지금 호도정은 타성의 소유가 되어있다.
'능성具'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능성구씨 주요 집성촌 (0) | 2014.03.26 |
---|---|
하남시 효죽동, 능안마을 (0) | 2014.03.26 |
촌수 와 명칭 (0) | 2014.03.15 |
남아호걸 구팔주(具八柱) (0) | 2014.01.01 |
[스크랩] [충남 당진] 구예(具藝-능성구씨 4세) 묘역 (0) | 2013.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