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향기

감동과 어우동

구자융 2010. 7. 19. 19:53

감동과 어우동

유감동(兪甘同)과 어우동(於于同)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자유부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자유분방한 남성 편력을 벌이다 탄핵되어
「왕조실록」에까지 그 이름이 오르게 된다.

감동은 무수한 남자들과 통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보전했지만,
감동보다 50여년 후 거의 비슷한 통정사건을 일으킨 어우동은 사형에 처해진다.
어우동이 감동처럼 성종이 아닌 세종시대에 태어났다면 사형은 면했을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녀의 간통사건은
점차 성 모럴이 보수화되어가기 시작한 시점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감동은 세종 때의 여인으로 검한성(檢漢城) 유귀수(兪龜壽)의 딸이며,
무안군수와  평강현감을 지낸 최중기(崔仲基)의 아내였다.
사건이 처음 보고된 세종 9년의 「실록」 자료에 의하면,
남편 최중기는 무안군수로 부임할 때 감동을 데리고 갔다.
그러나 감동이 병을 핑계로 도로 서울로 올라와
방종하게 굴자 최중기가 버렸다고 한다.
여기서 방종이라함은 아마도 성적 방종을 의미할 것이다.

「실록」은 감동의 사건을 처음 보고하면서,
그녀가 관계했던 남자로 이승, 황치신, 전수생, 김여달, 이돈 등 6명의 이름을 밝혔다.
이들과 함께 감동이 공식적으로 밝힌 남자들의 숫자는 서른 아홉명이었고
그 외에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더욱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감동이 관계했던 남자들의 숫자 보다는 그들의 신상이었다.
이들은 공조판서 등의 관리와 공신의 자제 등 대부분이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세종 9년 9월16일 최종 종결될 때까지 거의 두 달을 끌었다.

「실록」 자료를 정리하여 간통자의 이름을 모아보면
그 중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히 양반들이다.
총제 정효문, 상호군 이효량, 해주판관(海州判官) 오안로,
전 도사(都事) 이곡 등이 제법 고관들이었고 장연 첨절제사(長淵 僉節制使)
사직(司直), 부사직, 판관, 찰방, 현감 등의 벼슬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수공업 기술자인 공장(工匠)으로 수정장(水精匠) 안자장(鞍子匠)
은장(銀匠)도 있었으니 감동은 신분에 상관없이 애정행각을 벌였던 듯 하다. 


              전모를 쓴 여인                                             신윤복의 월야밀회

그런데 「세종실록」은 김학지가 올린 상소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감동의 추악함도 처음에는 이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김여달에게 강포한 짓을 당하여 이렇게 된 것입니다.
여달이라는 자는 어두운 밤을 타서 무뢰배와 결당하여
거리와 마을을 쓸고 다니다가 유감동 여인을 만나 순찰한다고 속이고
위협과 공갈을 가하여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서 밤새도록 희롱했으니
이것을 보더라도 유감동이 처음에는 순종하지 않는 것을
강제로 포악한 짓을 행한 것이 명백합니다".

김여달은 감동을 강제로 성폭행한 후,
대담하게도 감동의 남편인 최중기의 집에까지 드나든다.
감동이 굳이 병을 핑계삼아 남편을 떠나 한양으로 간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 후 감동은 남편에게 가차없이 버림을 당한다.
남편에게 이혼 당한 감동은 이후 여러 사람의 첩으로 행세하기도 하고
창기로 행세하기도 하면서 문란한 생활을 일삼는다.

조선왕조는 감동 사건의 최종 판결로 감동을 변방의 관비로 보내는 형을 내린다.
감동의 경우는 분명 이혼 당한 여성, 즉 남편이 없는 여자였으며
스스로 창기라 칭했음에도 불구하고 간통죄가 성립했던 것이다.
간통죄는 다른 죄와는 달리 시대의 흐름이나 국가마다
문화의 차이에 따라서 죄의 성립 조건이 매우 다르다.

조선시대의 간통죄의 개념 역시 오늘날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세종 9년 동자와 임견수는 결혼을 하지 않은 미혼 남녀였는데
혼인을 치루지 않고 관계를 맺었다 하여 간통죄로 처벌됐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남녀 모두 혼인 관계가 성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관계를 갖는 것은 모두 간통으로 취급했다.

당시 감동이 관계를 맺은 것으로 발설한 남자는 공식적으로 서른 아홉 명,
법에 의거하자면 사대부 집 출신의 여자와 간통을 한 남자들 역시 중벌에 처해져야 한다.
그런데 이 시대에는 여자가 강간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 후의 행실이 정숙하지 못할 때는 남자에게 죄를 돌리지 않았다.

따라서 감동을 강간했던 김여달은 물론 나머지 상간자들도
장형이나 파직 정도의 가벼운 처벌만이 내려졌다.
그 중에는 다시 벼슬에 오른 사람도 있다.

어우동은 조선초 성종시대 승문원지사(정3품) 박윤창과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실록」에는 어을우동(於乙于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종친(효령대군의 손자 ) 태강수 이동(李仝)의 아내가 되었으니,
그녀는 왕실의 종친녀라는 귀한 신분의 여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銀 그릇을 만드는 공인과
노래와 춤을 췄다는 이유로 남편으로부터 쫓겨나게 된다.
친정집에서 슬픈 세월을 보내고 있던 어우동은 마침내 한 지아비에게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여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이름을 현비로 개명한다.
그리고 감동처럼 창기로 행세하면서 자유분방한 남성 편력을 벌인다.

어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녀와 통정하려는 남자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고,
어우동에 대한 이야기는 장안의 화제가 된다.
「성종실록」은 그녀가 정욕이 남달랐던 여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편에게서 쫓겨나 친정집에 머무르던 어우동을
타락의 길로 이끈 것은 계집종이었다.
계집종은 어우동에게 아전 오종연이란 사람을 소개한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이후의 「실록」은 어우동이 먼저 유혹하거나 혹은 유혹당하기도 하면서
오종년을 시작으로 방산수 이란, 수산수 이기, 전의감생도 박강창,
이근지, 내금위 구전, 생원 이승언, 학록 홍찬, 서리 감의향,
밀성군의 종 지거비 등과 관계를 맺은 사실을 열거하고 이외 수 십명에 이른다고 적고 있다.

어우동과 여종은 길가의 집에서 오가는 남자를 점찍었는데,
여종이 “아무개는 나이가 젊고,
또 아무개는 코가 커서 주인께서 가지실만 합니다”라고 말하면
어우동은 “아무개는 내가 맡고, 아무개는 네게 주겠다”며 남성들을 분배했다고 한다.

여성에게 큰 감옥일 뿐이었던 조선시대에 어우동은 아버지와 남편,
아들에게 속하지 않은 독립여성이자 남성들에 대한 선택권을 쥔 유일한 자유여성이었다.

사실 어우동의 이런 자유분방한 성생활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그 불법의 공간에 뛰어든 것은 그런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남성 사대부들이었다.
그것도 종친에서 공신출신 벼슬아치까지 조선을 지배하는 사대부들이었다.

종친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는 단오날 그네 뛰는 어우동의 모습에 반해
남양군(南陽郡)의 경저(京邸)에서 정을 통한 후 어우동의 길가 집에 드나들었다.
적개 좌리공신 출신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어유소(魚有沼)는
조상을 모시는 사당(祠堂)에서 어우동과 정을 통했다.
어우동은 물불가리지 않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는
즉시 그 자리에서 본능적인 애정행각을 벌였고 근친상간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관계한 남자 가운데 특히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팔뚝이나 몸에 먹물로 자신의 이름을 문신하기를 강요했다.
이리하여 전의감 생도였던 박강창은 팔뚝에 어우동이라는 글자를 새겨넣게 되었고,
서리 감의향은 등에다가 어우동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홍찬은 과거에 합격하여 유가길에 올랐으나 그녀로 인해 신세를 망쳤다고 한다.
어우동에게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번좌라는 딸이 하나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활화산 같은 본능의 행각은 도승지 김계창의 줄기찬 탄핵으로
의금부의 문초를 받게 된다. 


             어우동                                                       신윤복의 회춘

성종 11년 9월, 어우동이 의금부에 체포되고나자
조정은 또 한번 그녀에 대한 처벌 문제로 들끓게 된다.
어우동은 귀한 신분의 여자였기 때문에 처벌에 대한 논의가 조심스러웠던 반면,
또한 그녀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하고나 간통을 했다는 사실은
신분제 사회인 조선왕조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큰 문제였던 것이다.

그녀가 의금부에 끌려오게 되자 먼저 의금부에 잡혀와 있던 방산수 이란은
사형을 면할 비책으로 감동의 예를 들면서 간통한 사람의 이름을 모두 대면
사형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에 어우동은 방산수가 일러준대로 간통한 사람들의 이름을 모조리 댔다.
「실록」에는 어우동과 관계된 자료가 적지 않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은 어우동과 간통한 사람을 밝히고 처벌의 형량을 정함에 관련된 것들이다.

그런데 형량을 정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다.
예컨대 방산수 이란이 어우동과 간통한 사람이라고 지목했던
어유소(魚有沼),노공필, 김세적, 김칭, 김휘, 정숙지의 처벌 문제가 큰 관심사가 되었다.
사헌부에서는 이들을 철저히 조사해 중벌에 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성종과 일부 관료들은 방산수와 어우동이 자기들의 죄를 가볍게 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일부러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은 석방하여 신문하지 않았고
김칭, 정숙지 등은 한 차례 형신(刑訊)하고 석방했다.

성종의 처분은 논란거리가 되었으나 끝내 이들에 대한 추가적 처벌은 없었다.
어유소는 병조와 이조의 판서 좌찬성 등 최고위직을 지낸 중신이었다.
또 방산수와 수산수는 임금의 종친(宗親)이었다.
관직이 높을수록 간통죄에 대한 처벌이 미약했던 것이다.

그 외 간통한 사람들도 처벌을 받기는 하였으나 모두 가벼운 것이었고
그녀와 통정했던 남성들은 성종 13년 8월 이난과 이기가 유배형에서 풀려난 것을
마지막으로 모두 석방되고 조선의 남성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삼종지도를 가르쳤다.

상대 남자들에 대한 처벌이 이토록 가벼웠던 데 반해
성종 11년(1480) 10월 18일 어우동에 대한 처벌은 극형에 처해졌는데,
어우동은 결국 왕실과 관계되어 있고 많은 관료들이 연루되어 있는지라
시끄럽고 창피한 일로 치부되어 더 빨리 처형을 당했던 것이다.

또한 어우동은 감동에 비해 운이 나쁜 점도 있었다.
조선왕조는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정절관념을 강요했는데
어우동이 죽기 3년 전 성종은 여성의 재가 금지라는
우리나라 역사상 유래가 없는 가혹한 족쇄의 법을 제정하고 만다.

성종 8년에 제정된 이 법제는 재가한 여자의 자손은
벼슬할 수 없다는 규제를 만들어 과부들의 발목을 잡는다.
재가가 금지되다 보니 과부들은 경제적으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져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는 여자들도 많았다.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재가 금지법은 이후 4백년 동안 준수되어
서민들까지도 과부의 수절을 실천하도록 만들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된다.

성관계란 남녀 둘이 있어야 가능하다.
동성끼리의 성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것은 성적 소수자(小數者)의 일이다.
따라서 감동과 어우동 사건은 여성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남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들을 희대의 음부라고 가혹한 처벌을 주장했던 조선시대 관료들,
그리고 이들과 놀아난 양반계층의 남성들이야말로
겉다르고 속다른 도덕적 위선자들이었다.

남성들이 도덕적 행위만 하는데 여성들이 음행을 자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우동이 교형을 당하던 날 「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사람들이 자못 어을우동의 어미 정씨(鄭氏)도 음행(淫行)이 있었을 것이라 의심하였는데,
그 어미가 이런 말을 하였다.
"사람이라면 누군들 정욕(情慾)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惑)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할 뿐이었다"》

어우동의 어미는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성욕을 갖고 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강하게 표현될 수도 있고, 약하게 표현될 수도 있다.
어우동은 비난의 대상이 될지언정 죽음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극단적 남성 양반 중심체제에서
차별과 억압의 사회를 거부했던 감동과 어우동,
그들은 사대부가의 양반신분으로 남성에게 예속되지 않는
남성의 주인으로 생을 살다간 자유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