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성과 한음 *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친구가 된 오성[鰲城, 호(號)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 호가 한음(漢陰)인 이덕형(李德馨)은 특히 선조의 신임이 대단했습니다. 임진왜란 동안 병조판서를 번갈아 맡았던 두 사람은 국난의 위기를 수습하고 대처한 조선 중기의 충신입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병조판서,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나중에는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어, 그래서 백사인 호보다 오성으로 더 잘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도 병조판서, 이조판서,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이란 관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한음 이덕형은 1561(명종 16)년에 태어나 1613(광해군 5)년에 세상을 떠났고, 단짝 친구인 오성 이항복은 1556(명종 11)년에 태어나 1618(광해군 1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음 이덕형이 오성 이항복 보다 5살이나 연상이었지만 관직은 항상 한음이 오성의 뒤를 이었고 결혼은 같은 해에 했습니다. 오성은 권율장군의 딸을, 한음은 정승 이산해의 딸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오성이 권율의 사위가 된 일화로서, 오성의 집의 감이 아주 풍성하게 달린 감나무 가지 중 몇가지가 권율 대감집의 담을 넘어 갔다고 권율가의 노비들이 몽땅 따가니 오성가의 노비들은 주인이면서도 감을 제대로 수확을 못하는 지경에 처합니다. 당시 옆집 권율대감집은 세도가 당당하여 오성의 집안에서는 감히 따질 수가 없지만, 이 사실을 노비들에게 우연히 전해들은 오성은 권율대감 집으로 몰래 들어가 권율대감이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주먹을 문종이 사이로 푹 집어 넣습니다. 권율은 갑자기 문종이가 ?어지면서 손이 들어오니 상당히 놀라지 안을 수가 없었지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느 놈의 짓이냐고 호통을 치자~~~. 그 때 오성은 "대감님 이 손이 문을 넘어오기는 했지만 누구의 손입니까?"하자 "그야 네 손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 (뭘 당연한 것을 물어보냐는 투로) "그런데 감나무의 큰 가지가 대감님의 담을 넘어왔다고 몽땅 가져가면 어쩌나요---?" 결국 이런 일화로 인해 권율의 사위가 되었지만~~~. 한편, 한음이 당시 세도가 당당한 이산해의 사위가 된 사연은 토정비결을 만든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이 한음이 어릴적 길에서 노는 것을 우연히 보고 장차 나라의 큰 재목이 될 인물이라는 것을 예감하고서, 그 당시 영의정이던 조카 李山海(이산해)에게 사위감으로 천거하자 결국 한음은 17세 때 네 살 아래인 이산해의 둘째 딸(당시 13세)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었다하니 지금도 인구(人口)에 회자되는 예언가이지만, 역시 토정(土亭)의 안목이 대단하지요! 평생을 친구로 지내며 우정을 나눈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은 어려서부터 재치 있는 장난을 잘 쳤는데 그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했답니다. 한번은 대궐에서 오성과 한음이 서로 내가 "아비"라며 농담을 하는 것을 본 선조 임금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는데---. “대체 누가 아비이고, 누가 아들이오?” 임금의 우스갯소리에 오성과 한음은 서로 더욱 자기가 아비라고 우겼답니다. 그러자 선조임금은, "그럴 것 없이 오늘은 내가 아비와 아들을 확실하게 가려 주겠소." 선조 임금은 신하를 시켜 종이 쪽지 두 장에 한자로 "아비 父" 자와 "아들 子" 자를 쓰게 한 후, 오성과 한음에게 뒤돌아 앉으라고 하더니 그 종이 쪽지를 접어서 두 사람 등 뒤 바닥에 하나씩 놓았습니다. "자, 이제 돌아 앉아서 앞에 놓인 종이를 한 장씩 집어서 펴 보시오." 오성과 한음은 얼른 종이 쪽지를 집어 펴 보더니, 먼저 한음이 “제가 아비입니다” 하며 "아비 父" 자가 써진 종이를 펼쳐 보이며 즐거워 하자, 오성도 역시 얼굴을 찌푸리기는커녕 싱글벙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조 임금이, "그대는 `아들 子` 자를 집었을 텐데 뭐가 좋아서 그리 싱글벙글하오?"하며 오성에게 물으며 의아해 하자, 오성은 무릎 위에 펴놓은 종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늘그막에 아들을 얻어 무릎 위에 앉혔으니, 이 아비의 마음이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오성의 재치 있는 농담에 선조는 무릎을 탁 치며 껄껄 웃고 말았답니다. 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이율곡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 중인 와중에 율곡 선생님과의 오성의 대화 한 토막~~~. "선생님 남녀의 어린 시절엔 그 것을 "자지, 보지"라 하다가 어른이 된 후엔 왜 그 것을 "좆, 씹"이라 합니까? 하고 질문을 하자 다른 유생들은 당황스러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율곡 선생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합니다. 잘 들어라, 우선 여자의 "보지"는 "걸어다녀야 감추어진다"는 뜻의 "보장지(步藏之)"라는 말이 변해서 된 이름이고, 남자의 "자지"는 "앉아야 감추어진다"는 뜻의 "좌장지(坐藏之)"라는 말이 변해서 된 이름이다. 또한 성인이 되어서는, 남자는 그 것이 항상 말라있어야 되기에 "마를 조(燥)"자를 쓴 것이 발음 편의상 "좆"이라 부르게 된 것이고, 여자는 그 것이 항상 젖어 있어야 하기에 "습할 습(濕)"자를 쓴 것이 된발음이 되어 "씁"이 되었다가 발음 편의상 "씹"이 된 것이다. 또 남자의 그것을 "자지"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아이 즉 자식을 낳는 나무요, 또 가지를 치는 것"이라 하여 "아들 子"자와 "가지 枝"자를 써서 "자지(子枝)"라 이르고, 여자의 그것은, 자식을 담아 기르는 보배스런 못이라고 하여 "보배 보(寶)"자 와 "못 지(池)" 자를 써서 "보지(寶池)"라고도 한단다. 당시의 사회 통념상, 율곡 선생님이 소인배 같았으면 호통을 쳤으련만 이렇게 자상하게 가르쳐 준 것을 보면 역시 "그 제자에 걸맞은 그 스승"이 아닌가 합니다. [蛇足] 이덕형과 이항복은 잘 몰라도, 오성과 한음은 대뜸 압니다. 오성의 호(號)는 백사(白沙)인데도 오히려 백사는 몰라도 오성은 잘 압니다. 그 호와 이름에 대해서~~~ * 호(號)와 이름(名) * 人之而有名하니 相互而稱呼이라 (사람에는 이름이 있으니 이는 서로를 부르기 위함이라) 敬稱而啣諱이요 平交而親號이다 (성함과 휘라 함은 경칭이요 호는 친한 사이의 호칭이다) 幼時冠前字이며 修學而生號인데 (어릴 때는 字라했으며 공부하면서부터 號를 쓰는데) 文士詩有號하고 書畵歌必號로다 (글 잘하는 선비와 시인들. 예술가에는 반드시 호가 있다) 自然山水得이고 鄕里貫地作이며 (호는 자연산수에서도 얻고 고향마을에서도 따 왔으며) 性品嗜好作인데 先後從而作이다 (사람의 성품과 좋아하는 특징을 보고 선.후배가 지어준다) |
'고전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老子의 人間 關係의 五誡命 (0) | 2011.01.09 |
---|---|
감동과 어우동 (0) | 2010.07.19 |
閑 中 (한가로움에 대하여) - 徐 居 正 (서거정) (0) | 2009.01.10 |
문벌과 당파 (0) | 2009.01.10 |
靑 山 倒 水 來 - 金炳淵 (김삿갓) (0) | 2009.01.10 |